정류장 밴치에서 할머니와 손자 손녀 셋.
퇴근길 버스 안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수많은 정류장을 지나쳐 온다. 오늘 저녁은 그 많은 정류장 중 집 근방에 있는 정류장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아무래도 내가 주로 활동하는 영역이 아닌 곳은 그냥 흔한 정류장의 하나에 불과해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나의 시선을 오래 잡아두지 못해 아무런 기억조차 없는 곳이 허다하다. 저녁 퇴근길에 보이는 집 근처의 정류장은 아침 출근길 정류장 환경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북적대고 급한 듯 서두르는 사람들, 상대적으로 깔끔한 헤어 스타일과, 옷매무새가 아침의 풍경이라면, 조용하고 쓸쓸하고 일과에 지친 누군가의 엄마, 아빠, 아들, 딸 등등 집으로 향하는 이들의 무거운 발걸음이 느껴진다. 이곳저곳 발 동동거리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있는 아침을 열어주는 정류장과 일과를 마무리하는 저녁 정류장의 풍경에는 많은 차이가 보인다.
오늘 저녁도 집 근처 초등학교와 건너편에 유치원이 있는 정류장에 버스가 멈추었다. 정류장에 마련된 벤치에 할머니 품에 서너 살쯤 보이는 손녀가 안겨있고, 그 옆으로 예닐곱 살 정도의 사내아이가 나란히 앉아있다. 동네 마실 나온 가벼운 옷차림과 사내아이의 킥보드가 옆에 있는 것으로 보아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 모양은 아닌 것 같고,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와 어린 두 손주가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은 아마도 ‘엄마’라는 예상은 쉽게 해볼 수 있다.
하루 종일 엄마가 그리웠던 아이들에게는 당연히 그 누구보다도 가장 반가운 엄마일 테고, 할머니에게는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시달린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일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엄마는 할머니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빨리 와주길 바라는 존재이다. 엄마가 내리지 않는 버스는 여러 차례 지나갔을 것이고 기다림에 지친 아이들의 투정 어린 이야기는 시작될 것이란 그림이 그려진다.
아마도 정류장 벤치에서는 저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할머니 엄마 언제 와?
왜 이렇게 안 와?
때마침 내가 타고 있던 버스에서 여자가 내리고 벤치에 앉아있는 할머니, 손자, 손녀에게 반갑게 다가간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엄마와의 상봉. 그새 할머니 품에 안겨있던 여자아이는 잠들어 있고, 사내아이만 좋아서 방방 뛴다. 아이에게는 아침에 출근한 엄마를 거의 10시간 만에 만나니 얼마나 좋았던지 엄마의 허리춤을 두 손으로 꽉 껴안으며 반가움을 표시한다. 어린 여동생은 아직도 엄마가 왔는지 모르는 듯 할머니의 양팔을 이불 삼아 잠들어 있다. 힘들고 지친 하루의 마감에 쓸쓸한 정류장에서 할머니의 무릎 위에 잠들어 있는 딸, 그 옆에서 킥보드를 만지작거리는 아들, 두 아이를 데리고 나온 할머니, 이 세 명은 엄마에게도 큰 즐거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엄마와 아이들의 상봉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인적이 드문 어두운 저녁의 적막하고 쓸쓸해 보였던 정류장의 한 장면이었을 텐데, 오늘의 저녁은 왠지 '아! 다행이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오는 따사로움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