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유일한 즐거움 막장 드라마.
막장스러운 아침 드라마에서나 들음 직한 사운드가 버스 제일 뒷자리에 앉아있는 나에게도 들린다.
여기서 사운드라 함은 어느 여배우의 찢어지는 듯한 괴성(자신의 남편이 불륜을 저지르는 현장을 목격하거나 상대방 여성과 한바탕 싸우는 장면)이다.
아침 출근 버스 안에서 드라마의 생생한 사운드를 모든 승객에게 전달하는 아줌마.
특유의 두둥 거리는 효과음이 들린다. 여배우의 하이톤 목소리 연기와 배경 음악만으로도 막장 드라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버스 뒷문 근처 자리에 앉은 아줌마의 핸드폰 화면이 보인다. 역시나 드라마 시청 중. 저 아줌마가 틀림없다.
이어폰도 꼽지 않고 어쩌면 저렇게 큰 소리로 볼 수 있을까?
아줌마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도 모자랄 정도다. 아줌마의 빵빵한 사운드를 자랑하는 핸드폰은 주위 사람에게 짜증을 유발하고도 남는다. 그러고도 한참을 아침 드라마 시청은 잠시 이어졌다. 그래도 주위 사람에게 미안한지 드라마 볼륨을 줄이는 아줌마. 일말의 양심은 있다는 말인가?
사실은 나도 예전엔 막장 드라마 애청자 중 하나였다.
1997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취업을 준비하던 기간. 한마디로 백수였던 시절. 다들 잘 알겠지만, 백수의 아침은 시간이 참 많이 남는다. 그 시간 엄마와 같이 막장 드라마를 보게 되었던 것이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막장 드라마의 마력에 빠지고 말았다.
참 신기했던 것은 나같이 젊은 청년에게도 이 막장 드라마가 먹힌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취업도 안 되고 뭐 딱히 할 일이 없다 보니 막장 드라마에 빠지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진짜 이유는 욕하면서도 궁금해 참을 수 없는 막장 드라마의 구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다.
또 한 가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열렬 시청자였던 엄마가 TV 앞을 지키고 있었다. KBS, MBC, SBS로 이어지는 막장 드라마 삼각 함대는 아줌마들의 고정 채널이었다. 일주일에 5일을 방영하는 드라마 러닝 타임은 길어야 25분 정도 분량. 길이도 짧아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러니 시청률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 없는 구조. 매일매일 아침을 공중파 3사의 드라마로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막장 드라마라는 장르로 불리지 않고 그냥 아침 드라마로 불렸는데.
그 시절 취직하기까지 6개월의 백수 기간이 있었고, 내 인생 막장 드라마를 즐긴 타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원한, 증오, 복수, 사랑, 시기, 질투, 개그, 끝이 없는 갈등. 이 모든 장르를 한방에 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이런 것은 대한민국 막장 드라마가 유일하다. 나의 짧았던 막장 드라마 이력이었지만 머릿속 어딘가에 강력하게 자리 잡은 흡입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막장 드라마를 졸업한 지 20년. 막장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내 머릿속의 막장 드라마 장르는 완벽히 지워졌다. 더는 보고 싶지도 않다.
아침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는 바로 아래층 아줌마. 볼 때마다 항상 밝게 인사해 주는 그 아줌마의 손엔 핸드폰과 귀에 꽂은 이어폰, 그리고 아침 드라마의 영상이 보인다. 항상 아침 드라마를 즐기는 한결같은 아줌마의 모습에서 20년 전 TV 앞에서 막장 드라마를 같이 즐겼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