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파랗게젊은것이
다행스러운 일은 이 회사에 들어오기 위해 고 스펙은 일절 필요 없다. 그동안 쌓은 경력을 인정받아 직장인이면 한 번쯤 꿈꾸어 볼 스카우트 제의.
바로 내가 그 스카우트의 주인공.
이건 내가 제일 잘 나갈 때의 일이다. 한 때 그렇게 잘 나가던 여성 그룹 '투애니원'의 '내가 제일 잘 나가'의 가사처럼 나도 한 때는 '잘 나갔다'
스펙 쌓느라 아등바등하지 않으면서도 첫 직장에서 두 번째 직장으로 쉽게 이동했다. 남들처럼 어렵게 이력서를 집어넣고 면접을 보며 당락의 결정이 떨어지기까지 가슴 졸이는 시간 없이.
어찌 보면 나는 혜택 받은 자(者)
나의 두 번째 직장은 애니메이션 회사. 첫 번째 회사도 그렇고 두 번째 회사도 애니메이션이다.
이제, 애니메이션 회사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먼저 애니메이션에 관련해 말하고 싶은 부분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흔히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다 같은 줄로만 안다. 지금의 젊은 층에게는 3D 애니메이션이 그들이 생각하는 애니메이션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픽사에서 '토이스토리'가 나왔을 때 세상은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와우! 저거 뭔데! 캐릭터에 볼륨감이 있어.
그동안 봐왔던 애니메이션과 차원이 달랐으니까. 인간이 손에 쥔 연필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비주얼이 강력했다.
그때가 1995년.
종이에 연필로 그린 그림이 아닌, 컴퓨터를 이용해 오로지 컴퓨터에 깔린 3D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로 제작한 작품이다.
'토이스토리'는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충격적인 인상을 심어줬다.
애니메이션 하면 이런 류의(토이스토리)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토이스토리 류의 애니메이션만 있는 게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2D 애니메이션
3D 애니메이션
이 둘의 구분은 너무나도 쉽다. 애니메이션의 모든 요소가 평면적으로 보이느냐, 입체적으로 보이느냐의 차이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한다고 할지 모르나 현업에 있는 자로서 이 차이는 분명하고 확연하게 다르니까.
내가 다녔던 그리고 지금도 다니는 회사는 3D 애니메이션 회사가 아니라 2D 애니메이션 회사이다. 한 땀 한 땀 사람의 손으로 직접 그린 그림 수만 장이 애니메이션으로 탄생한다.
역사로 따지자면 3D 애니메이션의 할아버지 뻘쯤 되는 관계. 뭐 그렇다고 윗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므로 오해 없길 바랍니다.
2D 애니메이션은 종이 위에 연필이나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동화지를 스캐너에 밀어 넣어 디지털 정보로 변환한다. 이 프로세스는 1995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니 그 이전의 제작 공정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겠다. 이렇듯 종이, 연필로 대표되는 작업이 2D 애니메이션이다.
나는 이렇게 두 번째 2D 애니메이션 회사로 옮겨왔다.
직장을 옮긴다는 건 좋든 싫든 부담감이 밀려온다. 더군다나 먼저 다니던 회사의 직급보다 올라간 자리로 간다는 건 두말할 필요 없이.
새로 입사한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맡은 직함은 팀장. 한 부서의 총책임자 자리. 나이 스물여섯. 지금도 그렇지만 2D 애니메이션 회사 직원의 평균 연령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나쁘게 말하면 젊은이들이 꺼리는 회사.
좋게 말하면........
음........ 음........?
뭐 이쯤.
생각이 안 난다.
의욕이 너무 넘쳤다.
누구나 그렇듯 새로운 환경에서는 없던 열정도 생기고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과함은 모자람보다 더 안 좋은 것을.
지금 되돌아보니 젊은이의 열정과 의욕은 과욕이었다.
"네가 뭔데?"
직원이 모인 미팅 자리에서 이게 내가 들은 첫마디였다.
필름을 되돌려 이 회사로 오기 전으로 돌아가 보자. 첫 애니메이션 회사는 2D 애니메이션에서 처음으로 디지털, 그러니까 컴퓨터를 도입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공정의 최 첨단 기술력을 자랑하던 회사였다. 한국에서는 말이다. 그런 회사에서 쌓은 경력자들이 나중에 다른 회사로 옮겨가 한 자리 씩 차지하게 되었다. 한 발 앞선 애니메이션 제작 프로세스를 경험했기에 그런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회사에서 기틀을 잡아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누구보다 앞선 애니메이션 제작 노하우를 바탕으로 뒤떨어진 회사를 개조한다는 일념. 오로지 머릿속은 새로운 팀을 만든다는 생각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옮긴 직장에서도 때마침 디지털 환경으로 전환하는 시기였기에 내가 가진 기술력과 딱 맞아떨어졌다. 종이, 연필, 셀, 붓, 물감, 거대한 필름 카메라, 암실로 대표되던 예전 방식의 애니메이션 프로세스에서 컴퓨터, 스캐너, 태블릿, 모니터, 네트워크, 서버로 바뀌는 과도기. IMF 이후 업계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런 시기에 나는 운 좋게도 첫 테이프를 끊는 주자가 되었고 나름 혜택 받은 존재가 되었다. 대한민국 애니메이션 업계가 격변하는 시기에 스타트를 끊었으니.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이 회사를 그 전 회사보다 더 기술력이 뛰어난 회사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
그러나....
입사 첫날.
의욕 만땅.
회사 장급들을 모두 모이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들의 입장에서 얼마나 얼토당토 하지 않았을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 알 겨를도 없이 의욕이 앞서다 보니 타인의 입장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커다란 타원 테이블에 사람들이 모였다.
모두의 눈초리가 매섭다.
특히 팔짱을 낀 채로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이 많아 보이는 여자의 시선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지가 뭐라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난리야"
그럼에도 모두 자리에 참석해주었다.
딱 봐도 나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은 없다. 이 업계 평균 나이가 많다는 사실은 타원형 테이블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아!"
"힘들겠구나!"
내 속에서 이미 자신감이 야금야금 사라질 것 같은 분위기.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싸한 열기마저 감돈다.
내가 그들을 불러 모은 목적.
잠시 그 목적이 무언지 떠오르지 않는다.
너의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는 차가운 침묵과 따가운 시선들.
애니메이션 경력이라고 해봐야 고작 2 년인 나이 스물여섯의 팀장. 새로운 스타일의 애니메이션 제작 공정을 설명하고 그들로 하여금 따라오게끔 전달하는 자리.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은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이미 잔뼈가 굵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새로 부임한 어린 병아리의 말을 듣겠는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한 마디라도 실수하는 순간 당장에라도 물어뜯겠다는 떨떠름한 상황이 이어졌다. 이미 냉랭한 분위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감추며 컴퓨터를 이용한 디지털 애니메이션 프로세스를 설명한다.
"네가 뭔데?"
한참을 설명 중이던 그때, 역시나 한 성격 할 것 같은 느낌이 들던 그녀의 한 마디가 터져 나왔다.
"뭔데, 우리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 살면서 이런 상황은 경험이 없던 터라 어찌 대처해야 할지 당혹스럽다. 단지, 애니메이션을 잘 만들기 위해 설명한 것뿐인데. 왜 이런 반응을 보일까. 당시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하던 대로 배운 대로 경험한 대로 노하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인 것을.
자신보다 한 참 어린 신참에게 지시를 받는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은 사람들.
이런 틈바구니에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아!....
첫날부터 여지없이 박살나버리는 바가지가 된 기분.
순탄치만은 않으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