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 애니메이션
정말?
이걸 다 한국에서 만든 거라고?
진짜?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에 입사 후 가장 많이 놀랐던 사실 중 하나.
그건 바로 우리가 흔히 봐왔던 애니메이션이 한국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제작했다는 사실이다.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제목만 들어도 알만한 그런 작품들.
뭐 그런 작품들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많다.
주변 지인에게 그거 한국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하면 십중 팔구는 놀라는 눈치다. 아니, 애니메이션에 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열의 열은 놀랍다는 반응이 돌아온다.
심슨가족, 톰과 제리, 스펀지 밥, 도날드덕, 101마리 달마시안, 곰돌이 푸, 타잔, 릴로 & 스티치, 스쿠비두, 배트맨, Star Wars: Clone Wars, Looney Tunes, 밥스버거, 패밀리가이 등등...
지금까지도 미국 애니메이션 제작에 한국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만드는 작품도 다양해지고 방영한 지 수십 년이 넘은 애니메이션도 끊이지 않고 제작되고 있다. 애니메이션 회사에 들어오기 전 이런 애니메이션은 전부 미국이나 일본에서 만든 거라고 생각했다. '심슨가족'이 미국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이라는 건 애니메이션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 정도 사실은 알 것이다. 나 또한 심슨가족은 당연히 미국에서 만들 거라는 흔한 선입견을 가진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어렸을 때, TV 앞에서 매일 보던 '톰과 제리' 또한 한국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연히 그럴 거라는 생각'
그림 스타일만 봐도 딱 미국스러움이 묻어나는 작품이기에 '심슨가족' = '미국'이라는 공식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아무런 의심 없이 미국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물론 작품의 모든 설정과(캐릭터 디자인, 스토리) 저작권은 미국에 있다. 이것이 바로 '하청공장'이라고 불리는 주된 이유가 아닐까.
달리 생각해보면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그들이 제공하는 자료를 토대로 정적인 이미지를 움직이는 살아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탄생시킨다. 애니메이터의 한 땀 한 땀 정성 어린 그림 한 장 한 장이 모여 22분 길이의 애니메이션이 되기도 하고 그런 그림 20만 장이 모여 한 편의 극장 장편 애니메이션이 되기도 한다.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는 않아도 가진 재료를 잘 버무려 '유'를 만들어 나간다.
이렇듯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미국, 일본 애니메이션의 상당수가 실제로는 한국에서 제작되고 있다. 때문에 한국 애니메이션을 '하청공장'이라고 비하하는 발언이 끊이지 않는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크레이티브가 없는 단순 노동이라고 덧씌워진 한국 애니메이션.
그럼 정말 하청 공장의 불명예로 전락한 한국 애니메이션은 단순 노동에 불과한 것일까?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말에는 찬성표를 던지기가 어렵다. 노동력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아주 상당한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 속에는 단순한 노동이 있다면 좀 더 고차원 적인 노동도 있다. 그렇다고 애니메이션 한 편이 뚝딱뚝딱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원청회사에서 모든 자료를 제공받는다고 해서 애니메이션은 그렇게 쉽게 탄생하지 않는다. 레고나 장난감 조립은 혼자서 가능하지만, 애니메이션은 그렇지 않다. 여러 파트에서 각각의 임무를 충실히 하지 않으면 애니메이션은 완성할 수 없다. 많은 인력이 필요하며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위 이미지(애니메이션 제작 시트)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시트는 캐릭터의 움직임과 그림의 순서 및 대사가 표시된 자료이다. 애니메이션의 시트는 장난감 조립에 있는 설명서와 같다. 장난감을 제대로 조립하기 위해 설명서를 잘 이해해야 하듯이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어떤 캐릭터가 '점프한다', '날아간다'. '팔을 구부린다' '목을 돌린다' 등등. 캐릭터의 동작은 단출한 가이드만 있을 뿐이다. 이 시트를 기반으로 애니메이터는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한다. 간단히 적힌 '점프'라는 단어에 애니메이터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실제보다 더 리얼한 움직임을 창조한다. 간결한 종이 시트에 불과한 전달 사항을 오롯이 애니메이터의 세밀한 감각과 센스로 새로운 결과물을 창조해낸다. 생동감 있는 '점프'를 만들기 위해서. 때로는 자신이 직접 점프를 하기도 하며. 이 과정에서 캐릭터는 팔딱팔딱 살아 움직이는 창조물로 변신한다. 굳이 주고받는 대사가 없어도 시청자는 캐릭터 동작 하나하나에 빠져들어간다. 현실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움직임이 애니메이터의 손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은 크리에이티브 자체이다.
이래도 '하청공장'이라고 불러야 할까?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은 이것뿐만 아니다.
1997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형 프로젝트가 진행된다는 이야기가 회사 전체에 퍼졌다.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대형 프로젝트라 하면 TV 시리즈가 아닌 극장 장편 애니메이션을 말한다.
잠깐 극장 장편 애니메이션과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의 차이에 관해 짧게 알아보자.
TV 시리즈와 장편의 차이는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매체가 TV냐 극장이냐의 문제라면, 만드는 쪽의 입장에서는 종이 크기의 차이가 극명하다. 물론 여기서는 2D 애니메이션을 뜻한다.
종이 크기에 따라서 애니메이션 완성에 필요한 시간은 상당한 격차가 발생한다.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은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종이를 사용하기 때문에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에 비해 작업 기간이 짧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큰 종이에는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이 더 필요하다. 종이의 차이가 애니메이션 제작에 있어서 모든 부서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ffauu5vIiQ&list=PL05EbAu3tuDeobsfk3nMtubELh8bWuUho
이 작품이 아마도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의 변화가 시작되던 시기의 최초 장편 애니메이션이 아닐까 한다. 정확한 검증은 어렵지만, 필자가 근무를 시작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최초로 디지털 장비를 도입해서 만든 작품이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작업의 기본 구조는 미국의 니켈로디온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모든 자료를 제공하고 한국 스튜디오는 그 자료를 토대로 작업이 이루어졌다. 기존의 TV 시리즈와 가장 큰 차이는 역시나 종이의 사이즈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당시 애니메이션은 종이에 연필로 그림을 그린 후 스캐너에 한 장 한 장 끼워 넣고 스캔을 하는 과정을 거쳐 다음 공정으로 진행했다. 대략 20만 장이 넘는 종이를 일일이 손으로 스캐너에 올려놓고 스캐너의 뚜껑을 열고 닫는 단순한 반복 동작으로 애니메이션 한 편은 시작한다.
모든 영상의 창작물이 그렇듯 작업 마감 기한은 정해져 있다. 미국 스튜디오와 매일매일 작업에 관한 미팅을 진행하면서 서로서로 납기를 지키기 위해 분발했다. 미국은 개봉 시기를 맞춰야 하고 한국 스튜디오는 미국 스튜디오가 정한 스케줄을 지켜야만 하기에 하루하루가 전쟁터나 마찬가지. 그러던 와중 미국 스튜디오도 스케줄이 빡빡한 나머지 한국 스튜디오에 전달할 자료를 제때 주지 못해 작업은 더디게 흘러갔다. 결국, 한국에서 캐릭터의 컬러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부분은 아니지만, 서로의 시간을 세이브하기 위해서 하청 작업임에도 캐릭터 모델의 컬러를 만들어주었다. 다행히도 이쪽에서 만든 컬러 전부 미국 스튜디오에서 승인이 떨어져 그대로 진행되었다.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가 미국이나 일본의 하청 작업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작품에 크리에이티브가 없다고 판단하는 건 맞지 않다. 애니메이션은 누구 하나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이 아니므로.
우리가 모르는 사이 전 세계 유명한 애니메이션은 한국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
'하청공장'이라고 우리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시선을 가질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