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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갸리 Apr 09. 2021

하청공장 컴퓨터. 3화

SiliconGraphics O2

애니메이션 하청공장에서 사용했던 컴퓨터

실리콘그래픽스 O2 워크스테이션

이 바닥에 처음 발을 디뎠을 당시,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 이하 '하청공장'이라고 표현하겠다. 필자가 다니는 애니메이션 회사를 비하할 목적은 털끝만큼도 없다는 걸 먼저 말해두기로 한다. 다만, 실상이 그러하므로 FACT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함이다.


아무튼

하청공장에 들어와서 필자 책상에서 처음 마주한 컴퓨터.

한 마디로 독특했다.

컴퓨터는 사각형에 네모 반듯하게 각이 잡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물건. 각은 사라지고 곡선으로 이루어진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 컴퓨터가 지녀야 할 요소를 깡그리 무시한 물체와 만났다.


컴퓨터가 왜 이래!
색깔도 기존에 없던 파란색.
이게 컴퓨터라고?


O2 그래픽 워크스테이션

이 장비를 설명하려면 1997년도로 거슬러 올가야 한다. 살면서 필자가 경험한 컴퓨터는 아래와 같은 형태의 모습이었다. TV 광고에서도 늘쌍 이렇게 생긴 컴퓨터만 선전했고 오프라인 매장에 가도 컴퓨터는 이 모습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인텔 인사이드'


우리가 아는 컴퓨터의 대명사는 인텔이다. 인텔이면 펜티엄은 저절로 따라붙었다. 컴퓨터는 다 이런 줄 알았다. 일반 사람들에게 인텔 펜티엄이 있었다면 업계 프로 유저에게는 유닉스를 대표하는 실리콘그래픽스가 자리했다. 생소하겠지만 이미 업계에서는 고성능 퍼포먼스를 자랑하는 컴퓨터로써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인텔 펜티엄이 아무나 살 수 있는 컴퓨터라면 실리콘그래픽스 컴퓨터는 아무나가 아닌 자금력이 있는 기업이 살 수 있는 제품으로 구분되었다. 컴퓨터 한 대 당 최소 천만 원이 넘었으므로. 개인에게는 쓸모없는 컴퓨터나 마찬가지. 흔한 윈도 97 OS가 돌아가는 게 아닌 생소한 IRIX OS가 주 운영체제로 돌아가는 장비였다. 상업용 하이퀄리티 영상을 제작하는 곳이라면 이런 특수한 워크스테이션을 갖춰야만 했다.  

인텔 펜티엄 3







실리콘그래픽스? 워크스테이션?

SiliconGraphics O2


하청공장에 입사했는데 무슨 미래 세상으로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책상 위에 놓인 이 컴퓨터와 시스템실 안에 거대한 랙에 장착된 이름 모를 기계들. 그곳에선 녹색, 빨간색, 파란색 불빛이 1초에도 수십 번씩 깜빡거리며 무언가 엄청난 작업을 하고 있다. 기계라서 말은 할 수 없지만 빠른 속도로 빛을 발산하는 장비들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알아? 내가 인간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
"나는 보통 컴퓨터가 아니야!"
"내가 아니면 이런 애니메이션 만들 수 없어!"


밥통처럼 생긴 컴퓨터와의 첫 만남은 이랬다.

사람들은 이것을 워크스테이션이라고 불렀다.




회사에는 이상하게 생긴 컴퓨터가 자리마다 놓여 있었다. 도대체 어떤 작업을 하기에 저런 컴퓨터가 필요할까. 언뜻 봐도 참 많이 비싸 보이는데. 사회 초년생의 눈에 비친 그 컴퓨터는 이 회사가 충분히 탄탄한 회사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한국에서 대기업이 아닌 이상 조그마한 중소기업은 자금난 때문이라도 언제 무너질지 모를 상황. 당시 한국은 IMF 금융 위기에 처해있었다. 불안감이 팽배했던 시대. 어느 기업의 누구라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환경. 특히 이런 중소기업이라면 더더욱. 신기하게도 국가 위기야 어떻든 하청공장은 잘 돌아갔으니 미래에서 온 듯한 컴퓨터는 나날이 회사를 가득 채워나갔다. 2D 애니메이션 업계는 IMF의 차디찬 한파도 견뎌냈다. 오히려 더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 시기에 애니메이션 사장들의 주머니는 무겁다 못해 터져 나갔다. 2,200원이 넘어가는 환율과 밀려드는 애니메이션 수주 덕택에 빌딩 임대인의 지위까지 획득하게 되었다.  






팀장에게서 이 컴퓨터는 특별한 존재라고 매일매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이건 컴퓨터가 아니고 워크스테이션이다"  
"니들이 아무데서나 만져볼 수 있는 기계가 아니야!"



뭐가 그리 특출한 지 갓 들어온 신입에게는 와 닿지 않았다.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워크스테이션이 뭔데?"
"뭐, 그냥 컴퓨터 아냐?"
"별거 있어?"



당시 컴퓨터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실리콘그래픽스의 장비들이 업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다는 건 익히 알려져 있었다. 일반 개인용 컴퓨터로는 감히 처리할 수 없는 성능을 자랑했고 업계 TOP 레벨에 있는 하드웨어 메이커라는 사실.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애니메이션은 이 장비 아니면 못 만들어"
"니들 월급 1년을 모아도 사지 못하는 장비다"


도대체 그런 좋은 장비를 사용하니 자부심을 가지라는 건지, 아니면 우리의 월급이 형편없다는 걸 주지 시키기 위함인지. 나보다 몸값이 비싼 녀석을 함부로 다뤘다가는 팀장한테 욕지거리가 날아올 판이었다. 사람보다 값어치가 더 나간다는 사실에 자존심은 약간 구겨지지만 장비가 비싸서 일까 작업하면서도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팀장은 우리는 남들이 사용하지 않는 장비를 사용한다는 일종의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 하등 쓰잘대기 없는 우월감을 자랑하곤 했다. 그래서 뭐 어쩔 건데? 그 우월감은 직원의 월급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슈퍼컴퓨터나 다름없던 하드웨어 사양은 다음과 같다.

하드디스크 용량 2GB

메모리 1.5GB  

CPU R5000 MIPS 칩  

OS - IRIX 6.3(유닉스 시스템)


현재와 비교하면 그냥 웃음만 나올 뿐이다. 그 용량으로는 작업은커녕 OS도 인스톨할 수준이 못 되는 사양. 

IBM 하드디스크 용량 2GB / 50핀 스카시 방식
모듈 타입 하드디스크





컴퓨터를 켜면 당연히 나타나는 윈도 97 로고는 보이지 않았다. 촌스러운 윈도 97과 달리 이 컴퓨터의 화면은 매끄럽고 고급스러웠다. 무엇보다도 빠릿빠릿한 느낌은 컴퓨터 초보인 필자에게도 금세 전달되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한 소프트웨어는 이 플랫폼에서만 동작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97 용으로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윈도 OS가 그래픽 성능에 한참 뒤처져 있었기에 하이퀄리티 영상을 제작하는 소프트웨어는 대부분 유닉스 계열 컴퓨터에서 작동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유닉스 OS 버전이 사라지고 없지만 당시 어도비 포토샵 3.0 버전이 이 워크스테이션에 깔려 있었다는 사실. 유닉스 계열 OS는 영상 업계에 한 때 대단하던 시절이 있었다.   


킹스톤 메모리 / 이때만 해도 일본산 메모리는 잘나갔다
O2 NEC 메모리 & 메인보드

지금 생각해보면 하드디스크 2GB, 메모리 1.5GB 가지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다.  - (2021년도 애니메이션 제작 환경에서 배경 그림 한 장이 2GB가 넘어가기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한 편이 이 하드웨어에서 탄생했다. 그만큼 실리콘그래픽스 하드웨어의 존재감은 강력했다. 애니메이션 업계를 비롯해 대한민국 모든 포스트 프로덕션에서도 맹활약을 펼쳤으니.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기술의 발전 때문에 실리콘그래픽스는 시장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마치 지금의 LG 휴대폰 사업이 26년 만에 핸드폰 시장을 떠난 것과 마찬가지로. 변화의 흐름을 타지 못했기 때문에.  

   

O2 메인보드 모듈

대한민국 장편 디지털 2D 애니메이션의 시작에 사용한 컴퓨터는 윈도 계열이 아닌 유닉스에서 출발했다. 일반 사람에게는 큰 사건이 아니겠지만 애니메이션 업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것 하나만큼은 짚고 넘어가고 싶다. 100% 수작업(전통 셀 애니메이션)에서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선택한 하드웨어는 마이크로소프 윈도가 탑재된 것이 아니라 유닉스 계열의 워크스테이션이었다는 사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대한민국 디지털 2D 애니메이션의 스타트를 장식한 실리콘그래픽스의 존재감은 확고했다. 아무리 비싸도 그만큼 가치가 충분하다면 기업에서는 꺼릴 이유가 없었다. 기꺼이 지갑을 열어 재쳤다. 이 하드웨어로 한 달에 TV 시리즈 애니메이션 (22분 기준) 20편을 제작했으니 투자 가치는 충분하지 않았을까. 20편은 정말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24시간 365일 풀로 돌아갔으니. 24시 편의점처럼 쉬지 않고 열려 있는 하청공장이 된 셈이다. 애니메이션 한 편 당 수주 단가 약 17만$ 하던 때의 이야기다.


하청공장의 길을 열어준 하드웨어는 '인텔 인사이드'가 아니었다. 단, 미국 애니메이션 제작에 한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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