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도덕률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재규(장동건 역)는 신념을 지키려는 소아과 외과의사다. 아내가 아빠찬스를 활용해서 체험학습을 본인이 일하는 대학병원에서 해주기를 바랐으나, 아들에게 '정정당당한 삶의 선택'을 기대하며, 아들을 설득하고, 아들의 과실치사혐의를 확인 후 자수를 얘기한다.
한편 아들이 폭행한 노숙자가 죽고 사건이 묻힐 가능성이 높아지며, 아들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자, 결국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아들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왜 그의 선택이 달라졌을까?
자신이 믿는 공정과 도덕성은 상황이 바뀌었다고 하루아침에 바뀌진 않는다. 다만 한계의 지점이 어딘지 확인했을 뿐이다. 내가 가진 생존과 번식이라는 생물학적 본능을 인간의 이성이 통제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돌아보게 된다.
인간이 가진 도덕적 우위는 나의 생존과 자손의 번식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타협이 가능하다.
그 지점이 위협받을 때는 결코 사회적 규범과 도덕성은 내가 지켜야 할 도덕률이 아니다.
우리는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그리고 채상병의 죽음 앞에서 수많은 입장들을 뉴스화면으로 보고 있고, 많은 쟁점들에 대한 법원의 결정이 우리의 도덕률과 사회적 합의의 어디쯤에 다가가 있는지 판단한다.
전쟁이 나고 살육의 현장에서 휴머니즘은 그럴 듯 하지만, 나와 나의 가족에 생명이 위협받는다면, 어떤 휴머니즘이 타협으로 가능하겠는가?
그렇다고 인간을 하나의 동물의 한 종으로만 살아갈 뿐이라고 단정짓기에는 우리 생의 목적이 너무 초라해진다.
문제는 '자신들이 아직 어리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걸 이용'할 정도의 영악한 인간을 어떻게 단죄해야 하는가다. 미성년자의 위법행위에 대해 우리 사회는 어디까지 관용을 베풀고, 기다려주어야 하는가?
지금의 세상을 만든 어른들은 그 책임에서 얼마만큼 자유로운가?
자식의 불안과 피해자의 고통, 그 사이의 아버지로서의 연민과 도덕적 요구 사이에 서있던 재규는 결국 자식을 지키기 위해 형의 살인을 선택하고, 법정에서 그것도 우발적 범행, 아니 도로에 서 있던 사람의 책임 역시 분명히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내가 당신을 죽일 수도 있다. 자격도 없는 당신이 내 자식의 잘못을 정죄한다면. 당신이 형일지라도.
결국 재규는 자신이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고통은 기꺼이 감내할 수 있으나, '나의 자식이, 나로 인해 생겨난 생명이 그 생존과 미래에 어떤 형태의 위협이라도 받는다면 이를 막기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다. 그것이 도덕률이건 법률이건 상관없이'라는 신념을 보인다.
그렇다면 가난한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돌보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수술시간을 미리 잡아두는 선행을 기만으로 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고통과 도덕률을 가진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간섭되는 도덕적 기준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인간은 각자가 가진 도덕률은 늘 '생존과 번식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이라는 뿌리에 기인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의 소재들에서 인간이 가진 양면성의 민낯을 볼 때 불편해진다. 아마 그것이 우리 속마음, 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며 나와 상관없는 이의 생명을 존중하고 공생해야 하는 사명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법은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범위로 한정되어야 한다.
사회적 도덕률은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개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여전히 세상 속에서 나와 나의 가족이 살아가고 번성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아수라의 세상에서 나와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좀 더 나은 사회적 공기를 만들어야 함에도, 외부적 요인으로 그 안위가 위험에 직면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다.
'생존적합 종으로 남은 인간이 가야 하는 올바를 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내가 가진 도덕률의 한계점은 어디인가?
진실은 고통스럽다. 다만 그 고통을 고통으로 온전히 느낄 때만 그렇다.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지점에 이를 때 우리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