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출근 중 고속도로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사색가는 아니지만 가끔 한 번씩 나름 깊은 생각에 들어간다. 폭풍 같이 지나간 몇 달 동안, 회사 일에 힘을 엄청 쏟은 후에 느껴지는 감정은 사뭇 달랐다.
'맞아. 내가 이런 일을 잘했었지... 참 열정적이었었지... 자신감이 있었지...' 조직에 망가진 부분을 진단해서 개선점을 찾아내고, 최고의 역량은 갖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노력하는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나름 희열을 느끼는 모습이 나였다.
그런데 뭔가 빠졌다.
마음속 깊이 그리고 길게 느껴지는 게 없다.
이제 여기에서는 보람을 못 느낀다.
관심이 다른 데 있으니 즐겁지는 않구나.
얼마 전까지도 회사에서 번잡한 일을 피했던 내가 결국 일을 맡겠다고 했던 이유는 윗사람의 눈치 때문에 아니었다. 대단히 정의감에 불탔던 것도 아니고, 천성이 부지런한 사람도 아니고, 머리가 특출 나게 좋았던 사람도 아니고, 항상 그저 평범한 나였는데 지금의 나를 만든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었다.
부끄러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참(慙)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 - 하늘이 알까 두려운 것
괴(愧)는 다른 사람의 눈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것 - 남이 알까 두려운 것
부처의 제자들은 부끄러움을 여러 가지로 나눴다고 한다.
능력이 모자라는 부끄러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부끄러움,
죄를 숨기는 부끄러움
그리고, 가장 저열한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무치(無恥)
한 시민으로서의 참여 의식, 직장인으로서의 직업적 윤리,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수많은 관계에서의 예의 들. 그런 따위를 버리면 세상을 살기는 좀 더 편할 거다. 하지만,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갈등을 감당할 수 없을 터다.
그래, 그래서 이만큼 인정받는 거다. 부끄럽게 살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