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하루, 작은 시간 속에서
“오빠, 하나도 안 변했네?”
오랜만에 만난 동생의 말이었다.
요즘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나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라
거울을 볼 때마다 눈에 띄는 흰머리며
조금씩 깊어지는 주름이 신경 쓰이곤 한다.
그래서 염색도 하고,
나름대로 관리를 하려는 중이었는데,
오랜만에 본 친구의 말이라 괜히 기분이 더 좋았다
오늘은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을 만나는 날이다.
나는 군 전역 후에 대학에 입학했기에,
동기들은 모두 나보다 어린 동생들이었다.
지금은 철 지난 유행이지만 공교롭게도
우리 넷의 혈액형이 모두 달랐고,
그만큼 성격도 각자의 혈액형처럼 제각각이었다.
처음엔 그런 차이들이 오히려 마찰을 만들기도 했다.
생각이 다르고 방식이 달라, 갈등이 생기기도 했지만
결국엔 그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더 깊은 관계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며 함께 자라왔다.
그런 동생 같은 친구들과 오늘,
정말 오랜만에 넷이 다시 모였다.
만남의 장소는 동명동.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네다.
내 대학 시절엔 지금처럼 동명동이
활기를 띠진 않았지만,
지금은 골목마다 따뜻한 감성의 여유가 스며든
카페와 식당들로 가득하다.
그 평화롭고 온화한 분위기는,
요즘 내가 좋아하는 감성과 꼭 닮아 있다.
점심을 함께한 뒤, 전원주택을 개조한 감성 카페에 들렀다.
서로의 근황을 나누고,
삶의 무게와 고민도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각자 바쁜 직장생활, 결혼, 육아 등으로
일상에 치여 자주 보지 못하지만,
이렇게 만나면 다시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는 사이
그게 우리였다.
이후에는 실내 서바이벌 게임장으로 향했다.
사실 처음 접하는 놀이였기에 기대 반, 의구심 반이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제법 무게감 있는 조끼와 연결된 레이저 총을 착용하고,
상대의 조끼에 붙은 센서를 조준해 점수를 얻는 방식이었다.
실내는 꽤 어두웠고, 구조물 사이사이로 몸을 숨기거나 이동할 수 있게 설계돼 있었다.
야광 불빛 아래, 나는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총을 들고 뛰고, 숨고, 쏘며 완전히 몰입했다.
총 세 번의 게임이 진행됐고,
처음은 개인전, 두 번째는 둘씩 짝을 이룬 2:2 팀전,
그리고 마지막은 다른 팀과 함께한 4:4 팀 대결이었다.
처음 두 판은 룰에 익숙해지느라 다소 허둥댔고,
꼴등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판에선 감을 잡아
내가 1등으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우리는 넷이 같은 팀이었고,
어느새 땀범벅이 된 채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몰입이 얼마나 깊었는지,
마지막 라운드에서는 달리다 친구와 부딪혀 함께 넘어지기도 했다.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고,
그 순간마저도 오래 남을 추억이 되었다.
웃음도, 소리도, 장난도, 모두 그 시절 그대로였다.
이후 남들처럼 그 시절로 돌아가 평범하게
스티커 사진도 찍고, 보드게임도 하고, 저녁까지 함께했다.
타지로 이사가 멀리 온 친구의 막차 시간이
다가오자 우리는 거리를 따라 가볍게 산책했다.
5월의 저녁 바람은 선선했고,
불 켜진 카페와 식당. 그리고 길거리의 풍경이
오늘 하루를 더 아름답게 감쌌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웃고, 먹고, 떠들고, 즐겼던 하루였다.
짧았지만 깊게 스며든, 그런 하루.
가끔은 생각한다.
젊음 하나로 충분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도,
그때의 인연과 마음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면
그건 그 시절을 여전히 내 안에서 살게 해주는,
참 따뜻한 기적 같은 일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