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살 것인가>, 유현준
2020년을 시작하는 책으로 유현준 교수의 <어디서 살 것인가>를 골랐다. 개인적으로 전작인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과 함께 2020년의 출발을 건설회사에서 시작하게 된 인연이 더해져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 책이다.
건축은 우리 주변 어디에도 있다. 그러나 거리를 지날 때 그 공간의 건축보다는 사람들에게 눈이 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 건축물들은 부차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그것들은 인간이 만든 인공물일 뿐이기에 어떤 형상으로 대체돼도 마치 상관없다는 듯말이다. 이러한 생각의 기저에는 우리 인간이 건축을 지배하고 그것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인 반면, 건축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는 존재라는 오만한 생각이 깔려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과거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건축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해 있으며 인간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설명해내며 내 편협한 사고를 돌이켜 보게했다.
인류 역사에서 건축물을 단순히 '형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오랜 세월 '어디서 살 것인가'를 정하는 문제는 '그 공간에서 기분이 좋은가 또는 내 가치를 더 높여줄 수 있는가' 수준의 고민이 아니라 '저곳에서 살면 죽고, 이곳에서 살면 산다'를 좌지우지하는 중대한 고민이었다. 인류는 자신이 존재하는 지리적 공간에서 최적의 삶의 터전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전해왔고, 어디서 사는가는 많은 경우에 그 집단의 성격을 총체적으로 결정짓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로마는 천 년 이상 지속됐는데 몽골제국은 150년 만에 망한 까닭은"이라는 장에서 저자는 몽골제국이 빨리 망한 이유를 유목민족이었던 그들이 '텐트'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 지배력을 과시하고 유지할 만한 대형 건축문화를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반면, 로마는 벽돌과 아치를 이용해 대형 건축물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제국의 유지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우리는 왜 일본보다 근대화가 늦었을까"라는 장에서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은 이유가 '온돌' 난방 시스템 때문이라는 특이한 해석을 내놓는다. 저자는 온돌 시스템 아래에서 우리나라는 단층짜리 주거지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반면에 일본은 온돌 시스템을 수입했지만 지진으로 인해 구들장이 내려앉을 위험을 대비해 온돌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었고, 가벼운 다다미방에 '화로'를 놓는 방식의 난방 시스템을 이용함으로 인해 그 당시에 경제적으로 앞섰던 한국이나 중국보다 수백 년이나 빨리 2층 집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도시의 고밀화가 사람들 간의 의견 교환을 촉진시키고 그로 인해 혁명 또는 혁신이 생겨난다고 책에서 거듭 주장하는데, 일본의 2층짜리 주거 형식으로 인해 도시가 고밀화될 수 있었고 두터운 상인 계급이 생겼고, 수출이 증가하고 개항도 빨라져 근대화가 먼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대로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의 인류 진화론을 대부분 수용하되 인류 발전의 역사를 건축학적으로 접근하는 이러한 저자의 시각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유현준은 과거뿐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형상, 구조 등을 세밀히 조절할 수 있게 된 지금에도 건축은 그 거리를 바꾸고, 도시를 바꾸고 나라 전체의 생산성을 좌우한다며 반복해서 '건축 결정론'적 귀납을 시도한다.
많은 아이디어가 등장하지만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건축의 모습을 감히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면 '전통 또는 개성은 간직하되 최대한으로 개방된 통섭의 공간'이다.
로마를 걷는 일이 왜 지루하지 않았는지, 왜 사람들은 홍대, 가로수길, 이태원에 몰리는지, 왜 대한민국의 학교 모양으로는 창의적인 인재가 나오기 힘든지 실리콘 밸리에서는 어떻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샘솟는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따라가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리고 책을 읽는 와중인 만큼은 지나가는 동안에도 이 건물은 왜 이렇게 지어졌을까? 내게 어떤 느낌을 주고 있는가? 생각해보며 나만의 기준을 고민해보게 됐다. 건축물은 같은 양식으로 지어지더라도 미묘한 차이가 발견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보는 눈'을 기르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가 속한 따분했던 공간은 풍부한 이야기보따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생겨났다.
그런 점에서 이 두문장으로 책을 저술하는 목적을 밝힌 저자의 목적은 일정 부분 이상 성공했다.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주변의 공간을 읽어 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세상을 화목하게 만드는 건축을 하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부담스럽다면 그저 독자 여러분이 나름의 방식으로 건축을 즐길 수 있기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일반인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전문가의 영역인 건축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의심하기 쉽지만, 근대와 현대의 건축은 일반인들의 수요를 기반으로 변화해왔다.
정치적으로 접근해보면, 도시 건축에 대해서 자신의 기준과 유사한 정치인을 뽑는 일은 내가 어디서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하나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미시적으로는 어디에 살면 집값이 오를까 가 아니라 어디서 살면 내가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도 건축을 이해함으로써 생겨나는 변화일 수있다.
즉,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살 곳을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세금을 내고 있기 우리는 공간을 어떻게 구상할 지에 대해 이야기할 권리가 충분히 보장받아야 함은 물론이다.
이 글을 쓰는 나에겐 특별히 단지 내가 어디서 살 것인가를 넘어서 다른 이의 삶을 결정하는 공간을 설계하고 시공하는 건설사에서 일하게 된 만큼, 앞으로 얼마나 건축을 이해하는 가는실적을 얼마나 낼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게 아쉬운 점은 철저하게 건축공학적 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를 위한 교양서로 만들어졌다 보니, 굉장히 다양한 주장이 제기됨에도 불구하고 그 논증의 깊이가 얇다는 점이다. 실증적, 과학적 입증 없이 아이디어만을 전달해주다 보니 "재미는 있는데 너무 비약 같은데...?"라는 의심과 함께 읽던 책을 덮고 인터넷 검색을 하게 되는 때가 자주 있었다.그리고 검색을 하면서 저자의 연구윤리와 책에 실린 내용의 전문성에 대한 지적이 실제로 여러 차례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건축 전문가로서 건축에 대해 국민들에게 눈을 뜨게 하는 좋은 역할을 해내 줬다는 대가로 큰 보답을 받고 있는 만큼, 저자에게 큰 기대가 모이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의 역할이 이정표를 넘어 훌륭한 내비게이터로 이어지기를 바라본다.
어디서 살고 싶은가?
지금 고민해봐야 할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