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의 공간일기」- 조성익
지난 독서 모임의 주제가 '공간'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각자에게 책이 잘 읽히는 공간이 어디인지에 대해서 논의하는 대화가 오고 간 적이 있었다.
어떤 분은 ‘욕조’라고 답하셨다. 신기했다. 집에서 욕조가 없다 보니 그곳에서 책 읽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어떤 분은 헬스장이라고 하기도 했다. 헬스장에서 책을 읽는다고? 다소 엉뚱한 대답에 실소가 새어 나왔다. 사람마다 집중력이 생기는 공간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이어지는 대답들은 '퇴근 후 야근해야 하지만, 일은 손에 안 잡히는 회사 안', 어떤 분은 '출근길 버스 안'이라고도 했다. 아마 나는 늘 그렇듯이 따분한 대답이나 내놓았다. '즐겨찾는 카페'... 사실 크게 생각나는 곳이 없었다. 그렇지만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최고의 독서 공간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비행기 안이 최고였던 것 같다.
다른 별다른 이유는 없다. 말 그대로 ‘비행기모드’. 데이터가 차단된 공간, 책 보다 더 신속한 쾌락을 얻을 수 없는 곳에서는 책이 최고다. 위에 나온 '욕조'도 아마 같은 맥락에서 뽑힌 공간이 아니었을까. 긴 시간을 보내는 중, 전자기기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책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에서 소개되었던 마이크로소프트 빌게이츠가 1주일 동안 책을 잔뜩 들고 조용한 휴가를 떠난다는 일화가 크게 공감이 되었다. 많은 정보에 노출되어 있을 빌게이츠에겐 물리적인 현실과 거리두기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었을 것이다. 인간적 감수성을 위협받는 업계에 있다 보니 나에게도 그러한 공간이 필요했다.
독서모임에서 '책이 잘 읽히는 공간'으로 국한하여 이야기했다면, 이 책 '건축가의 공간일기'는 우리가 머무는 모든 공간으로 논의를 확장한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자신만의 공간을 찾을 것을, 그리고 그곳에 대해 기록하는 '공간 일기'를 써볼 것을 권한다.
"한 장소에 오래 머물며 공간이 거는 대화에 맞장구를 쳐줘야 한다. 만약 건축가라면 그 음미의 방법은 우리 가즈야처럼 스케치북을 꺼내 공간을 그려보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공간 일기를 꼭 건축가만 써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림 그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면 굳이 그리지 않아도 좋다.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릴 때, 공간의 간단한 묘사와 내 행동과 감정의 변화를 짧게 적기만 해도 당신만의 공간 일기가 된다. 그마저 어렵다면 그저 이곳의 무엇이 내 행동과 감정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지 잠시 관찰해 보는 일만으로 족하다. 중요한 것은 수프를 입에 넣기 전에 잠시 향을 음미하는 그 순간을 갖는 데 있다."
"그럴수록 내가 사는 동네를 자세히 들여다보라. 산책도 하고 안 가본 골목에 들어가 보기도 하면서 공간을 음미해 보라. 어느 동네든 자주 다니며 세심하게 관찰하다 보면 발밑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동네를 탐험하다 보면 일상에서 나를 두고 싶은 공간 목록이 생긴다."
‘책이 잘 읽히는 공간’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도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듯이, 우리가 오고 가는 공간들에 대해서는 사실 할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다. 공간은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정작 나는 공간에 대해서 비교적 무관심했던 것 같다. 어차피 '카페가 거기가 거기지'라는 무의식이 현실주의자 대문자 S인 내게 자리했었다. 한 번 다녀온 카페를 끈덕지게 재방문 해 본 기억도 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소개해준 추천인과 이 책의 저자는 '그들의 공간'에 대해서 굉장한 애정을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둘의 공통점은 모두 공간일기를 쓰고 있고, 그들이 가진 공간에 대한 취향은 선명하다는 점. 좋은 공간을 찾아보고, 내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고민했을 그들의 그런 열정과 시선들이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나도 이 책을 계기로 감히 '내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공간들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다만, 나는 이게 좋다, 싫다 정도 감정의 표현을 할 수 있을 뿐 아직 공간에 대해서 표현할 느낌들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때 이 책의 저자인 ‘조성익’이라는 건축가의 섬세한 시선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저자가 책에서 추천해 준 공간에 들르기로 한 것이다. 과연, 내게도 좋은 곳일까?라는 기대감을 품은 채 나는 망원동에 있는 작은 바로 향했다.
'책바'는 망원동의 조용한 바이다. 이 바의 콘셉트는 '책'. 전시된 책도 많지만, 사람들 손에 책이 한 권씩 들려있다는 것이 이 바의 핵심이다. 둘 정도의 인원이 와서 책을 두고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술 한두 잔을 마시면서 책을 읽는 그런 공간이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공간을 너무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 진갈색 우드톤의 인테리어, 가사가 없는 재즈음악, 그리고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분위기, 이것들이 합쳐져서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다만, 여기에서 집중이란 독서실에서 수험생들이 자아내는 그런 침묵과는 완전 딴판이다. 고요한 가운데, 여유가 흐른다. 독서하는데 '칵테일이나 위스키 한 잔 정도는 걸쳐도 별 문제없다'는 시크한 태도의 사람들이 모여서였을까? 재촉하지 않고, 매너 있게 접객하는 직원들 때문이려나? 오래간만에 마치 잠수하듯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찾은 것 같아서 신나고 설렜다. 아마 책을 읽을 때가 아니라 주말에 일을 할 때도 이곳에 종종 들르게 될 것만 같다.
'책바'로 인해 저자의 신빙성이 한층 상승했다. 다른 나머지 공간들도 꼭 들려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그리고 공간 일기가 주는 이점도 금세 깨닫게 되었다.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 더 많아지고, 공간을 보는 안목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그 공간에 가면 사진만 찍어 남기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이 왜 좋은지에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겸손한 문체로 이런 생각들을 공유한 조성익 님의 글이 마음에 든다. 그가 사용한 표현들,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취향들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3학점짜리 좋은 교양수업을 들은 기분이 들었다.
공간 일기를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곳에서의 감상들을 핸드폰 메모장에라도 적으며 차근차근 내 애착 공간들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나는 앞으로 빛을 잃은 별들로 잔뜩 채워뒀던 나만의 네이버 즐겨찾기 지도를 선명한 별자리로 만들어볼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