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 감수성을 지키기 위한 독서

『화씨 451』과 상상력의 불씨

by 글쟁이 결변


1.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설의 힘


좋은 소설은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겠지만, 내가 가진 기준 중 하나는 그 소설이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드는가에 있다. 나는 소설이 반드시 현실적인 묘사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독자가 그 세계를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TV나 휴대폰을 켜면 우주의 모습조차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런 관찰은 피동적이다. 그저 존재를 확인할 뿐,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다.


2. 주체적인 체험으로서의 독서


반면 좋은 소설은 글이 멍석을 깔아주면, 나는 감독이 되어 머릿속에서 장면을 끊임없이 연출하게 된다. 이런 주체적인 체험이 주는 쾌감이야말로 내가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다. 결국 소설은 우리를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분리시켜야 한다.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끌 수 있을 때, 나는 그 작품을 좋은 소설이라 부르고 싶다. (그래서일까, 소설을 쓴다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3. 『화씨 451』이 다시 불러일으킨 긴장


이러한 기준으로 볼 때, 『화씨 451』은 내게 언제 읽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명작이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한 번 읽었음에도,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주인공 몬태그가 책 한 권을 품에 안고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 비티 서장의 심문 장면에서 또다시 손에 땀이 차올랐다. 책이 금기로 여겨지고, 심지어 책을 소지한 사람까지 불태워지는 세계 ― 이 설정은 여전히 강렬하고 자극적이다.


4. 현실의 책을 태우는 자들


이 작품을 계기로 실제 역사 속 ‘책의 화형’을 찾아보게 되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나치의 반독일서적 소각, 그리고 문화대혁명까지. 시대와 장소는 달라도, 맹목적인 권력은 언제나 책을 적으로 삼았다. 책은 사람들에게 상상하게 하고, 사유하게 하며, 명령을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재자에게 책은 늘 위험한 존재였다.


5. 책이 선택받지 못하는 시대


오늘날 대한민국은 책을 통제하는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인위적인 검열이 없어도 책들은 여전히 ‘방화’되고 있다. 단지 선택되지 않기 때문에 버려지고, 태워진다. 전 세계적으로 다시 텍스트의 가치가 부상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독서량은 급격히 줄고 있다. 아마 그 이유는 여가로서의 독서를 대신할 더 손쉬운 수단들이 넘쳐나기 때문일 것이다. 즉각적인 영상물, 특히 유튜브 같은 것들 앞에서 책은 점점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


6. AI 시대의 새로운 지적 습관


유튜브를 이야기했다면, AI도 빼놓을 수 없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AI는 일상과 업무에 거의 쓰이지 않았다. 이제는 일상에서 분리할 수 없는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그로 인해 과거보다 덜 쓰고, 덜 고민한다. 책을 찾아봐야 하는 시간은 눈에 띄게 줄었고, 지식을 저장하기보다 AI를 통해 관리하고 발전시키는 시대가 되었다. 인간이 더 멍청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제 사람들은 AI에게 일을 시키고 그것을 검수하는 능력을 기르고 있다. 그 결과물은 과거보다 신속하고 정교해졌고, 생산성 측면에서는 진보라 할 만하다.


7. 기술의 진보와 검열의 그림자


그러나 『화씨 451』에서처럼 로봇과 기계화를 통한 사회적 검열이 현실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로봇과 AI는 검열뿐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예컨대 이스라엘 단체가 팔레스타인 조직의 통신기를 해킹해 폭탄을 설치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다친 사건이 있었다. 또 자동차 보안 소프트웨어를 해킹해 차량을 조종할 수 있는 기술도 이미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AI의 통제권을 가진 자에게 권력과 언론의 주도권이 함께 이동하는 현상도 부인하기 어렵다.


8. 강한 인공지능, 어느 덧 현실이 된 상상


더 나아가 인간의 조종을 기다리지 않는, 이른바 ‘강한 AI’의 등장은 이미 예견된 수순처럼 보인다. 1953년 『화씨 451』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에는 단순한 상상에 불과했던 ‘로봇개’가 오늘날 현실이 된 것을 생각하면, 인간의 통제 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공지능의 등장은 그리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 로봇』 같은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시대에 『화씨 451』을 다시 읽으면 섬뜩한 전율이 일어난다.


9. 그럴수록 더…! 인간적 감수성의 가치


그럴수록 나는 AI를 통제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슬프게도 나는 공학과는 벽을 세워둔 인생을 살아버렸다.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씁쓸함이 찾아온다. 한편,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도 생각났다. 이런 세상일수록 더욱 소중해지는 것은 기계화에 역행하는 인간적인 감성, 특히 감정적 유대감이 아닐까. 법률 해석처럼 기술적 영역은 기계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지만, 감정과 관계를 이해하는 인간적 감수성은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막연하지만, 그래서 나는 책이 사라지는 시대에 오히려 책을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로봇의 시대에서 책을 꺼내드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