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해요? - "언제 들어도 좋은 말", 이석원 에세이

방구석에서 읽기 좋은 소개팅 에세이

by 결Library

연말에 쇼파에 누워 읽기 좋은 흥미진진한 에세이를 찾았다.


이런 이런 큰일이다 너를 마음에 둔게

당신을 애처로이 떠나보내고

그대의 별에선 연락이 온지 너무 오래되었지

(중략)

나에게 넌 너무나 먼 길

너에게 난 스며든 빛

이곳에서 우린 연락도 없는 곳을 바라보았지

이런 이런 큰일이다 너를 마음에 둔게


언니네 이발관, <가장 보통의 존재> 중


이 책을 고르게 된 계기


언니네 이발관의 이 을씨년스러운(?) 노래는 이름만 모를 뻔 인디를 좋아하는 내가 종종 들어본 노래였다.

분명 쌍방이 좋아하다 헤어져 만든 이별 노래 같음에도 10CM의 <스토커>의 일방적인 사랑이 떠올려지는 쓸쓸하고 애처로운 노래. 더 낭만적인 편의 델리스파이스의 <고백>도 떠오르기도.

특이하게도 이 노래의 가수를 알게 된 계기는 <보통의 존재>라는 동명의 베스트셀러가 언니네 이발관이란 밴드의 보컬리스트로부터 쓰였다는 사실을 들었던 것이다.


밴드 보컬리스트가 쓰는 에세이라...? 호기심이 발동했던 나는 <보통의 존재>를 읽으려 사둔 후, 이유 모를 그 책을 방치해 뒀다. 어디 두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아마 먼지가 꽤나 쌓였겠지.


그 후 내가 운영하는 독서모임의 연말 모임에서 함께 읽을 책을 고르려 할 때였다.

친한 형이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란 책을 제안해 왔다. 가만 보자, 저자는 이석원? 그때 그 보컬리스트가 아닌가.

그리고 나는 유튜브에 이석원을 검색하였고, 언니네이발관의 음원 녹음 영상들이 올려져 있음을 확인했다. 미간과 이마주름이 잔뜩 생긴 채로 그는 다른 세션들에게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그는 팀의 리더이고 잔소리를 하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영상에선 코로나 시절의 그가 마스크를 두 겹이나 걸친 채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HKajYl6d6k




그때 나는 내심 생각했다. 이 사람은 나랑 정말 안 맞는 사람이겠구나... 까다롭고 방어적이고 무엇보다 날카로운 사람, 그게 내가 그에게서 받은 인상이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연말모임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읽을 책으로 그 책을 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을 다음번에 읽을 책으로 골라야겠다고도 다짐했다. 연말에 따스함을 느낄 만한 책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론 날카로운 그의 작가적 감성이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서론이 지나치게 길었지만, 이게 내가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시작한 이유였다.

이 책을 해외여행 중에 잡았던 것은 결과적으로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



이 책은 무려 소개팅에서 만난 한 여자와의 만남과 이별을 담은 소개팅 후기글이다.


그 주제도 신선하지만 무엇보다도 작가의 개성이 독보적이다. 내가 유튜브를 보며, 이석원 씨를 판단한 선입견들은 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었다. 그렇지만 그런 그의 독보적 개성이 몰입도를 올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조금도 좋은 사람으로 보이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이는 솔직한 글.

그는 찌질하기도 했고, 방어적이기도 했고, 날카롭기도 했다. 한편 그가 좋아했던 그녀는, 마주보는 게 어색하다고 숫기없어 하는 그를 위해 그의 옆자리에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는 여자. 그는 당당하기도 솔직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심리 상담사처럼 이야기를 잘 들어주던 그녀에게 그렇게 사랑에 빠진다. 사랑 앞에서 그는 한 없이 유약해지기도, 한 없이 따뜻한 남자가 되기도 했다.


이석원 씨는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 남자에게 생긴 정서적, 육체적 변화를 가감 없이 써 내려갔다.

단순히 소개팅 후기를 담은 내용이라면, 그 내용이 진부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와 이 여자의 관계는 그동안 우리가 연애 소설로 보던 관계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결혼을 한 번 경험하고, 더 이상 실패를 경험하기 두려워 하는 남녀들은 그 관계를 ‘섹스 파트너’ 로 시작한다. 이들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설명하면 그렇다. 그러나 그 다섯 글자로는 이들의 미묘한 관계를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섹스 파트너를 넘어, 진지한 마음이 커지자, 그는 그녀의 긍정적인 반응 하나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가도, 부정적인 반응 하나에 세상은 무너져 내린다.


40대가 넘은 시기의 사랑도 20대의 그것과 다름없이 사람을 송두리째 흔들기 충분하다는 것을, 그것이 사랑의 힘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실 연애할 때 누구나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모습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상대방에게 멋진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에, 그런 조바심이 실수를 부른다. 저자도 선생님이라 부르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그녀에게 조바심을 내고 그녀를 오해하고 결국 갈등에도 이르게 된다. 어느새 나는 이석원씨와 그녀가 잘 되었으면, 이석원 씨의 진심이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조마조마하고 두근거린다.


남의 연애사를 듣는 일은 언제나 재밌는 일이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연애프로그램에 열광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시청자가 방송으로 당사자의 깊은 생각을 알게 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본인의 심리 묘사를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해 두었기 때문에 비교적 그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이 자조적이며 냉소적인 에세이 안에는 특이한 유머코드들이 있는데 읽다가 웃음이 몇 번이고 터져버렸다. 자존심이 약간 상해버렸지만 그의 센스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석원 씨에게 어느새 경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말 똑똑한 사람이기에 이렇게 재밌는 글을 쓸 수 있었겠지. 작 중에서 그가 한 권의 집필을 위해 몇 년을 고민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이해될 정도였다. 자기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담아낼지 정말 많은 애가 쓰였을 것이다. 그 고민이 느껴지는 책이다.


뭐해요? 썸 타는 사이라면, 가장 설레는 그 말. 언제 들어도 좋은 말. 제목이 책의 내용을 연상시키지 않아서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차라리 "뭐해요?"가 어땠을까 ㅎㅎ


뭐해요? 아! 이건 내가 쓰고 싶은 종류의 에세이이자 소설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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