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0일
미케네 도착.
여기도 길개들과 길고양이들이 귀염을 떨고 난리다. 겨울이라 마감시간이 이른 줄 모르고 왔던 관광객들이 유적지에 입장은 못하고 아쉬워하다가 얘네들의 귀여움에 반해 먹이를 주며 사진도 찍고 재미있게 놀다 떠난다. 하지만 우린 오늘 여기가 집이다. 호젓한 산 속인 데다 깔끔한 주차장이 있고 무엇보다 전설 속에만 있을 것 같았던 미케네 왕국이 손에 닿을 것처럼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하룻 빔을 지낼 수 있다니 달콤하게 설렌다.
2011년 12월 11일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박물관을 열자마자 출근한다.
작은 사람모형의 부장품들이 너무 귀엽다. 얼핏 보면 아이가 만들어 놓은 것 같이 보이면서도 생략과 왜곡을 자유자재로 표현한 만든 이의 예술적 감각이 현대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떤 조각품은 표정까지 재미있다. 그리고 미케네의 유명한 황금 가면이 보인다. 아가맴논의 황금 가면으로 알려져 있는데 진품은 아니다. 아가맴논은 트로이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의 주인공이다. 대부분의 진품은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세 명의 여인이 나오는 프레스코화가 눈에 뜨인다. 조금 남아 있는 조각들을 바탕으로 복원해 놓은 그림이 있는데 그 당시의 의상이나 장식이 우아하면서도 몸을 구속하지 않는 디자인이다. 게다가 이 옷을 입은 사람이 당장 앞에 나타난다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세련되고 현대적인 느낌이다. 그림 속 여인들은 신분이 높은 사람들로 보이면서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수많은 도기들은 구멍이 여러 개 있어 편리한 사용을 위해 많이 연구했던 모습이 짐작된다. 포도주 상인이나 올리브 상인의 집에서 발견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얼핏 생각하면 그 옛날 소수의 지도자들 외에는 대부분 농사를 지었을 것 같은데 포도주나 올리브를 직접 담그지 않고 시장에서 샀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시장에서 저런 걸 사 먹어야 할 정도로 단순한 농업 사회가 아니고 다양한 직업이 분화된 사회였을 수도 있겠다.
유적지 안내자 길 개와 들꽃
고양이들이 귀여움을 떨며 먹이를 구할 때 커다란 개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눈치만 본다. 그런데 유적지 가는 길에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남편에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내 옆자리를 차지한다. 수천 년 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졌던 미케네 제국을 안내하러 온 모양이다. 박물관을 지나 유적지로 가는 길목에 신기하게 생긴 이름 모를 꽃이 우리를 맞이한다. 저 들꽃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세월을 피고 졌을까? 괜스레 신비로운 느낌에 젖어 유적지로 들어선다.
미케네 초기 문명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모두 무덤을 통해서 이다. 무덤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수천 년 전에 멸망했던 왕국의 비밀을 그 당시 살았던 사람들이 아닌 죽은 사람의 집에서 찾게 된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다. 미케네 문명 초기 견고하게 돌로 만들어진 무덤은 안으로 들어오면 가운데가 타원형의 돔 형식이다.
처음에 간 무덤은 가운데가 뚫려 있어서 하늘이 보였다. 에피다우로스의 울림을 만들어낸 바로 그 원형을 여기서도 만날 줄 몰랐다. 이곳에선 작은 소리도 크게 증폭되어 그 울림으로 벽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내는 발자국 소리마저 자극적으로 들려 살금살금 걷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광민이 노래를 불러본다. 에페다우로스에서 못다 한 미련이 남았나 보다. 나도 '세이킬로스의 비문'과 카바피의 시 '이타카로 가는 길'을 을 찾아서 낭독해 보았다. 이 무덤의 주인과 내가 3천5백 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이 순간 한 자리에 있는 기분이다.
세이킬로스의 비문
살아있는 동안 빛나라
결코 그대 슬퍼하지 말라
인생을 찰나와도 같으며
시간은 마지막을 청할 테니
기원전 8세기 그리스의 유명한 시인 호머는 몇 천 년 동안 구전되던 전설을 바탕으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라는 작품을 썼다. 그것은 오래도록 그리스 문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사실이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몇 천 년이 흐른 뒤 멀리 독일에서 어린 소년 슐리만이 호머의 작품을 읽게 되었고, 작품 속 내용이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소년은 마침내 고고학자가 되어 잃어버린 제국 미케네를 발견하였다. 미케네는 기원전 3000년 경의 크레타 문명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1500년 경에 그리스의 두 번째 새로운 문명시대를 열었으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려 오래도록 전설로만 내려왔던 미궁 속의 왕국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왕국은 멸망했으며 그 범위는 크레타를 비롯한 그리스 전 지역을 포함한다. 그리스는 그 후 400년 동안 문자마저 잃어버린 채 역사의 암흑기를 보낸다.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은 19세기 사람이다. 미케네의 역사를 생각하면 나와는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소년시절 꿈을 잊지 않은 슐리만 덕분에 나는 아슬아슬하게 아주 먼 고대 그리스 문명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성 꼭대기에 올라서면 사방이 한눈에 보인다. 먼 옛날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은 전쟁의 불안 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왕궁터를 지나 지그재그 난 산 길을 타고 아래로 내려온다. 마을과 상점들이 있던 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탄탄한 길 저 앞에 사자의 문이 보인다. 미케네가 파괴된 뒤에도 사자의 문의 일부가 드러나서 미케네의 위치는 오랫동안 알려져 왔었다고 한다. 커다란 돌덩어리들 자체가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한데 거기에 사자상까지 더해졌으니 이 곳의 지배자는 이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지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문을 지나서 또 하나의 무덤을 만났다. 아가맴논 왕의 무덤이다. 아까와 비슷한데 이번엔 가운데가 완전히 막혀 뾰족한 모양이다. 그래서 훨씬 더 어둡고 소리도 더 증폭되어 두렵기까지 하다. 빨리 밝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광민이 질문을 던진다. 가운데를 저렇게 뾰족하게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왜 그런 모양을 만들었을까? 광민은 그것이 하늘세계를 향한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탈리아 여행 때 만났던 알베로 벨로가 생각난다고 했다. 탁월한 기억력과 연결능력이다. 이탈리아의 알베로벨로의 뾰족 지붕을 3천5백 년 전 그리스에서 만날 줄이야. 진짜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차피 우리에겐 멋대로 상상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