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싶은 순간

월송마을 산책 일기

2020년 1월 10일


광민이 창밖을 보다가 햇살과 눈발이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다며 나가자고 한다. 눈이 내리기는 하지만 바람이 없어서 햇살이 더욱 따뜻하다. 걷기에 좋은 날씨다. 며칠 동안 내린 눈에 발이 푹푹 빠지는 곳이 많다. 햇살이 좋아 차도 밑으로 난 둑길에 눈이 다 녹아서 그리로 걷자고 했다. 걷는 동안 점심엔 무얼 먹을지 머릿속이 분주하다. 문득 광민에게 물었다.


“자기는 점심에 무얼 먹을지에 대한 계획 같은 건 머릿속에 없지?’

광민이 말없이 웃는다.

“그런 자기가 부러워서 그래.”

난 늘 앞서서 걱정을 한다. 미리 걱정하는 법이 없는 광민이 부러워서 노력해 보지만 잘 안됀다.


“우리 오랜만에 외식할까?” 광민이 제안에 괜한 심술이 난다.

“자기는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에 대해서 너무 관심이 없어. 장보러 가기 전에 가능하면 전부 소비해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점심 메뉴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많이 걷고 싶어 졌다.

둑길이 끝날 때쯤 멀리 마을이 보인다.


“저기 보이는 마을로 가보자. 오늘은 좀 많이 걷고 싶다.”

그런데 조금 가다 보니 갓길이 거의 없는 차도로 이어지는 다리가 나온다.

“다른 길은 없어?”

“이 길을 지나야 만 해.”

“그럼 집으로 돌아가자. 안전에 제일 중요해.”


광민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시골길은 차들 속도가 너무 빨라서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짧은 다리 하나 건너는 거고 마침 옷도 빨간색 파란색 등산복 차림이니 마음을 바꿔먹기로 했다.


“그래. 그러면 한 줄로 서서 가자.”

그렇게 거의 차로만 지나다니던 월송 마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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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춰진 것 같은 풍경들이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처럼 내 앞에 펼쳐진다.

어렸을 적에 보았던 이발소 표시등이 일요인데도 불이 켜진 채 돌아간다.

이 풍경들은 언제까지 이렇게 남아있을까?

내게 아름다운 옛 모습을 보여주려 남아있는 애인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벅차오른다.

없어질지도 모르는 보물인양 소중한 장면들을 카메라에 담아 본다.

일요일인데도 문을 연 치킨 집에 손님이 보였다.


“우리 치킨 먹을까?”

“난 치킨을 맛있게 먹은 적이 별로 없어. 장사 잘 되는 집 아니면 기름 오래된 거 써서 맛없을지도 몰라.”

언제나 고집을 부리지 않는 광민.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왠지 안됐다.

“그래 치킨 먹으러 가자.”


결론은? 덕분에 나는 인생 치킨을 먹었다.

수북이 나온 치킨을 보며 반 정도는 싸가지고 갈 거라고 예상했었다. 배도 고프지 않았고 난 기름진 것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 둘 다 양이 워낙 적은 사람들이라.

그런데 얼마나 살뜰하게 손질했는지 누런 닭기름이 거의 없다. 수북한 한 마리를 다 먹어 치웠다. 평소 먹지 않던 튀김옷도 바삭바삭 남김없이.


“혹시 몸에 나쁜 독이 좀 들어갔더라도 이 정도 맛을 위해서라면 용서할 수 있겠어. 우리 내년에도 이 집에 또 오자.” 너무 많이 먹어서 1년은 있어야 다시 그 집이 생각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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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엔 눈보라가 제법 세차 졌다.

바람이 부는데도 서두는 기색 없이 찬찬히 주위를 살피며 걷던 광민이 길가에 굴러다니던 보물 한 개를 발견했다. (광민은 평소에 필요한 재료 중 많은 부분을 길에서 얻는다.)


다시 차도가 나오자 나의 안전 본능이 발동했다.

“우리 한 줄로 가자’”

내가 앞장섰다. 그런데 잠시 후 광민이 자신이 앞에서 걷겠다며 나를 뒤로 세운다.

“어? 자기 뒤에 서니까 한결 따뜻한 느낌이 들어.”

“그래서 새들이 한 줄로 나르는 거잖아.”

남편은 과학 선생의 이력을 가진 사람답게 나에게 원리를 열심히 설명해 준다.


생각해보면 나도 아는 내용이었는데 연결을 못 시킨 거다. 그런데 내가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수 십 년 살아오는 동안 이런 경험이 수도 없이 많았을 텐데 바로 이 순간 그걸 느낄 수 있었다는 거다.

작은 바람결의 차이를 알아차리고 당신 등 뒤에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던 바로 이 순간이 참 아름다웠다는 걸 기억하고 싶다. 작은 것도 소중하게 여기는 당신 덕분에 굴러다니던 쓰레기에서 이제 막 당신의 손에 들린멋진 보물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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