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피, 세상의 중심

2018년 12월 15일

3박 4일간의 아테네 여행 동안 일기를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새로운 볼거리들이 많을수록 기록할 수 있는 에너지가 딸린다. 그래서 조금 쉴 겸 아테네에 하루 이틀 더 머물고 싶었다. 아테네는 이제 날씨가 맑아지는데 우리가 가려는 델피는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난 상황 변수에 자주 현혹된다.) 광민은 반대했고 서로 의견이 달라 오랜만에 티격태격, 우여곡절 끝에 델피에 도착했다. 조금씩 비가 내리는데 우산을 가지고 가자는 나의 의견을 일축해 버린다. '티격태격'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채로 삐걱 거리며 델피 여행이 시작되었다.


지구의 배꼽 옴파로스

이곳은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땅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게 만드는 옴파로스가 보관되어있다. 옴파로스는 배꼽이란 뜻인데 제우스가 세상의 중심이 어딜까 궁금하여 하늘 양 끝에서 독수리를 날려 보내 만나는 지점에 이 돌을 떨어뜨려 표시했다고 한다. 그리스에는 몇 군데 옴파로스가 있으나 델피의 옴파로스가 가장 유명하다. 델피박물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무희의 원기둥 위에 옴파로스가 올려져 있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춤추는 여인들의 기둥은 천장에 닿을 듯 높고, 제한 적인 공간 속에서도 치마 밑으로 드러난 다리와 역동적인 몸동작, 살아있는 표정이 인상적이다. 행복한 미소가 인상적인 두 남자의 누드 조각상이 인상적이라 알아보니 재미있는 전설이 있었다. 클레오시스와 비톤이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인데 그들의 어머니는 헤라 신전의 사제였다고 한다. 신전에 갈 일이 있었는데 소가 밭에서 오지 않자 이 형제들이 멍에를 지고 직접 어머니를 모셔다 드렸다고 한다. 아들들이 자랑스럽고 고마웠던 여사제는 헤라 신에게 아들들을 가장 행복한 장소로 보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들들은 깨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여사제는 울었을까? 웃었을까? 그 옛날도 이 세상은 신이 보기에 고통이 많았나 보다. 그러한 고통과 불안은 돈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해 보니 가는 곳마다 신과 소통하는 사제가 여성이다. 신과 소통하는 것이 당시엔 최고 지위가 아니었을까? 아테네의 도시국가 시절에 여성에겐 참정권도 없었다는데 사제 역할을 여성이 했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코린토스에서는 수많은 여사제들이 뱃사람들의 안식처로 기능했던 반면 이곳의 여사제는 신과 연결되는 단 한 명의 예언자였다. 그 영험함이 세상에 알려지자 그리스에서 뿐만 아니라 아주 먼 나라에서 까지 자신들의 미래를 점치기 위해 방문객이 줄을 이었고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신탁을 받기 위해 서로 경쟁적으로 더 많고 진귀한 보물들을 바쳤다고 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유명한 오이디푸스 왕과 관련한 신탁을 비롯하여 수많은 그리스 비극은 이곳 델피의 신탁으로부터 탄생했다. 인간이 미리 자신의 운명을 점치거나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탐내는 것이 결국 비극을 부른 것이리라..


신탁을 받으러 온 방문자에게 신탁을 내려주는 파튀아라는 여사제가 신탁을 내려줄 때 앉았다는 세 발 청동 솥이 보인다. 사제가 앉기 위해 사용했다면서 의자가 아니라 솥이라고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사람이 앉기에는 입구가 너무 크다. 그 위에 올라앉은 것이 아니라 안에 들어가 앉아 있었기 때문에 의자가 아니라 솥이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혹시 진짜 그랬다면 솥 안에 있을 때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참 아늑하고 편안했겠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제우스나 기독교의 하나님과 예수가 남신이듯 이 곳의 주신도 아폴로라는 남신이다. 아폴로는 가이아라는 땅의 신이 자궁 없이 낳은 피톤이라는 용을 무찌르고 이곳을 차지하였다고 한다. 하늘의 신 제우스는 아내를 통하여 자식을 얻는데, 땅의 신 가이아는 스스로 피톤을 낳았다고 하니 세상의 첫 번째 신이 있다면 그것은 출산할 수 있었던 여신이 아니었을까?


박물관을 나오는데 빗방울이 제법 굵다. 다시 한번 우산을 가지러 가자고 했으나 광민의 고집 때문에 그냥 옷에 붙어있는 모자만 쓰고 출발.


월계관은 올림픽의 우승자에게 주던 것이 아니었다.


델피는 아폴론이 거대한 괴물 뱀 피톤을 죽이고 퓌톤의 아내였던 파티아를 자신의 사제로 만들어 세웠다는 신화가 있다. (가이아에서 피톤, 파티아로 이어지며 여신의 지위가 계속 떨어진 건 아닐까?) 그것을 기념하려고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몸을 꼬며 하늘로 올라가는 구조물이 있다. 원래는 뱀의 머리 위에 황금 잔을 올려놓았다는데 지금은 머리가 잘려진 모습이다. 그리스가 페르시아에게 승리한 기념으로 페르시아 군에게서 노획한 청동 무기를 녹여서 만들었다는데 진품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약탈해서 자신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히포드럼 광장에 전시해 놓았다고 한다.


신전으로 올라가는 길에 만나는 건축물들은 대부분 보물창고라고 하는데 무너져있었고 제법 큰 보물창고는 중요한 보물이 들어 있어서 더욱 신경 써서 만들었는지 보존상태가 괜찮았다. 드디어 기둥만 남은 아폴로 신전이 보인다. 이 신전엔 전실 후실 신실의 3개의 방이 있었는데 신실 안쪽의 아디톤이라는 방엔 여사제와 그 사제의 말을 전하는 신관만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신탁의 내용은 난해하고 해석이 애매한 경우가 많았다.( delphic에는 수수께끼 같은 이란 뜻이 있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이 그 수수께끼를 푸는데 도움을 주었고 흔히 소크라테스의 명언이라 알고 있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도 그중의 하나로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져 있다.


신전에서 아래로는 멀리 원형경기장이 보인다. 위쪽으로는 아폴론이 괴물 뱀을 죽인 것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파티아 제전이 열린다는 스타디움이 있는데 지금은 문을 닫았다. 스타디움은 6000명을 수용하는 규모로 제전은 4년마다 열렸다고 한다. 이 제전의 승자는 월계관을 받았다고 한다.(이제껏 알고 있던 것과 달리 올림픽우승자에겐 올리브 관을 주었다. 왜 이리 잘못 알려진 게 많은지..) 여기에도 재미난 신화가 있다. 아폴로의 놀림을 받은 에로스가 황금촉을 쏘아 아폴로를 사랑에 빠뜨리고, 바로 그 여인에겐 납촉을 쏘아 아폴로를 싫어하게 만들어 아폴로에게서 도망치다 월계수가 되었다는.


올림픽은 한 곳에서만 열리는 줄 알았는데 여행하면서 이렇게 4년에 한 번 열리는 제전을 그리스에서만 세 번째 만난다. 자기 도시의 위상을 키우고 자랑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도시마다 이 제전을 4년마다 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4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있었을 것 같다. 혹시 동서남북? 동양과 달리 유럽에선 상서로운 숫자 일수도 있겠다.


돌아오는 길에 빗방울이 더욱 굵어져서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대가로 광민은 내게 바가지를 잔뜩 긁혔다.




*아폴로 신의 월계관

아폴로는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의 화살이 장난감 같다며 놀린다. 여기에 화가 난 애로스는 황금촉 화살을 아폴로에게 쏘아 강의 신의 딸 다프네(Daphne)에게 빠지게 만들었고 다프네에겐 납촉을 쏘아 아폴로를 싫어하게 만들었다. 아폴로가 자신을 계속 쫓아오자 다프네는 그의 아버지 페네이오슨에게 자신을 변신시켜 달라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는 딸을 월계수로 바꾸었고 아폴로는 다프네를 사랑하는 마음에 월계수로 화환을 만들어 쓰게 했다고 한다.


아폴로의 별명 phoibos 태양의 찬란한 광채, 순수를 뜻한다. 이렇게 잘생긴 훈남이었지만 아폴로는 진정한 사랑을 얻지 못한다.


*잘생긴 아폴로 신의 사랑을 외면한 또 다른 여인 카산드라.


아폴로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언을 하는 능력을 주었으나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자 그녀의 혀에 저주를 걸어 사람들이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도록 했다. 카산드라는 트로이 전쟁을 예언했으나 아무도 그 예언을 믿지 않았다.


*쿠로스

쿠로스는 그리스의 남성 누드 조각상을 말하는데 기원전 6세기경까지의 고대 조각품에서는 '아르카익'이라 불리는 은은한 미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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