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무게가
우리 몸에 가르쳐 준 것

안탈리아 일기 2

늦가을 무렵 그리스에서 싸고 맛있는 오렌지를 먹기 시작했다. 한 겨울 터키의 안탈리아에 이르니 끝도 없이 이어지는 오렌지 밭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오렌지가 뜻밖에 내 몸에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주었다.


2019,1,22, 화요일


점심때 마을 뒷 산 쪽으로 산책을 갔다가 오랜지를 파는 농원에 들러서 오렌지 3킬로 그램을 사 왔다. 킬로당 1리라였다.(1리라는 당시 180원 정도) 마트에서 5킬로짜리가 10리라 정도 하니까 두 배 정도 싸다. 주인은 우리에게 맛보라고 오렌지를 까서 내민다. 꿀맛이다. 따놓은 오렌지를 마음대로 고르라고 주인장이 비닐봉지를 주었다. 내가 좋은 것을 고르기 힘들어하자 주인이 2분 정도 기다리면 금방 새로 따다 준다고 말한다. 나머지는 터키 말이었지만 주인의 말 중 ‘2분’이란 영어단어를 통해 짐작했다. 별로 내켜하지 않는 아들을 시키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직접 따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혹시 폐가 될까 봐 그만두었다. 금방 따왔는데 저울에 다니 기막히게 정확하다.


광민이 처음에 5킬로 사자는 걸 무거우니 안된다며 3킬로만 산 것은 참 다행이었다. 평소에 여러 번 다녔고10분 정도밖에 안 되는 길이었지만 오렌지를 들고 오는 길은 훨씬 멀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 작은 슈퍼에서 우유 한 병을 샀다. 1리터짜리 우유가 5,47리라다. 여러 번 샀는데도 오늘따라 값이 두 배로 느껴진다. 오렌지로 우유를 사려면 지금 들고 있는 이 무거운 오렌지가 한 봉지 더 필요하다. 집에 와서 보니 찌그러지고 못생긴 오렌지 하나가 들어있다. 심통난 그 아들의 장난기가 생각나서 웃음이 나왔다.


2019,1,23, 수요일


오렌지 무게가 우리 몸에 가르쳐준 것

오늘은 근처 잡화점에서 다섯 가지에 20리라가 안되는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샀는데 자꾸 큰돈을 썼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농가에서 산 오렌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전에도 싼 오렌지를 잔뜩 산 경험이 많았는데 왜일까? 아마도 집까지 오렌지를 들고 오는 동안 우리 몸이 3리라라는 돈의 가치를 체득한 것 같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낀 가치가 우리의 판단력을 지배할 수 있을까? 단위에 대한 착각이 거의 없는 광민조차 신접살림용 그릇세트 가격 250리라를 50만 원이라고 잠시 착각하기도 했다.


시장에서 만들어진 가격은 정말 합리적일까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여행을 하며 난 거꾸로 계산법을 발견하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싼 것이야말로 사실은 보물처럼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싸다는 것은 많이 나온다는 것이고, 그만큼 수요도 많다는 의미다. 그래서 새로운 지역에서 낯선 식재료를 고를 때는 양이 많고 싼 것을 골라봤다. 의외로 맛의 저항이 별로 없고 거의 모두 성공적으로 먹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보물'을 찾은 기분이 든다.


이제 겨울이 깊어가고 끝자락이 되면서 지금처럼 풍성하고 싱싱 한 과일과 채소들을 만나 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이런 계절에 다양한 터키 슈퍼의 진열장에서 보물찾기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IMG_3584.jpg 1000원짜리 우유와 오렌지 500원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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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예쁜 보물들

저녁에 갑자기 부엌 쪽에 전기가 나갔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주인장에게 내일 말하기로 하고 그냥 설거지를 하였다. 처음에는 깜깜하다 생각했는데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 만으로도 잘 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심지어 우리가 사용하는 빨강 노랑 파랑의 수저들의 색깔이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가 너무 밝은 세상에 익숙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것도 오렌지 덕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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