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죽다 살아난 날
오늘은 새로 태어난 날

안탈리아 일기 1

유럽엔 여행 쉥겐 협정이 있어서 여행자가 3개월을 계속 머무를 수 없다. 우리는 한 겨울 여행도 쉴 겸 안탈리아에서 두 달 살기를 하기로 했다. 2018년이 시작되는 날 우리는 안탈리아에 들어왔고 3.5성급 호텔에서 2박 3일 신혼여행을 즐기면서 신접살림 집을 마련했다. 수영장까지 딸린 집이지만 비수기에다 한 달 이상 기간을 살면 할인이 50% 적용되어 비용이 꾀 저렴한 편이다.



2019년

1월 9일 수요일 죽다 살아난 날

1월 10일 목요일 새로 태어난 날


지금은 오전 10시.

우리는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고 있다. 밖에는 길가의 먼지를 적셔 줄 정도의 비가 내리고 있다. 바람도 잔잔하고 가끔씩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아스팔트가 머금은 빗물이 타이어에 부딪치는 소리가 상쾌하다. 작은 소리 하나에도 행복이 묻어난다. 어제는 일기조차 쓰지 못했다. 죽음처럼 깊은 수렁에서 나오느라 우리 부부는 둘 다 많이 지쳐있었고, 푹 쉴 필요가 있었다.


우린 계곡을 따라 걷고 있었다. 양 쪽엔 오렌지가 주렁주렁 매달린 농장들이 계속 이어져 한겨울에도 눈을 풍요롭게 한다. 멀리 설산은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뒤로 숨어버려서 안타깝지만 설산 못지않은 바위산들이 새파란 하늘에 뚜렷하게 그어놓은 선이 장엄하게 시야 끝까지 펼쳐진다. 그 뚜렷한 선위로 드문 드문 서 있는 나뭇가지나 나뭇잎 사이로 파란 하늘이 빽빽히 들어 차 있다.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가끔씩 다니는 자동차들이 신경 쓰였고, 마음껏 풍경을 감상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그러다 건너편에 사람들이 산책로를 따라 걷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계곡으로 내려가 마침 준비되어 있던 통나무 의자와 식탁에 싸 온 간식 펴놓고 먹으면서 광민은 시내를 건너가 보자고 했다. 그렇게 깊은 물은 아니지만 잘못하면 운동화를 적실 수도 있고 , 아예 미끄러져 옷까지 젖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난 반대하였다. 광민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징검다리를 건너갔다 와서는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건너갈 수 있다고 말한다. 광민의 제안은 징검다리로 건너는 게 무섭다면 자기가 나를 업고 얕은 곳을 건너가겠다는 것. 광민이 꼭 건너가고 싶다고 생각한 이상 나도 노력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광민의 도움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곳을 더 찾아보고 싶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계곡이 좁아진다면 , 그리고 물이 더욱 적어진다면 건널 수 있는 곳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계산이었다. 샘물이 냇물이 되고 냇물이 개천 그리고 강 바다로 된다는 원리를 거꾸로 생각해 보면 간단히 답이 나온다. 그러나 현실은 계산과 달랐다. 그나마 개울 가운데가 삼각주처럼 돋아져 나와있는 곳이 물도 얕아서 큰 돌을 몇 개 들어 징검다리를 만들어 보려고도 했지만 막상 해보니 아무래도 무리였다. 강 폭이 좁은 곳은 물살이 세었고, 더 올라가면 건너 편의 산 길이 끊어져 버려 건너가도 위험한 길과 만난 다는 것을 확인했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가면서 운동화를 벗고 얕은 곳으로 건너가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어디서 건너는 게 좋을까? 먼저 건너가서 광민을 깜짝 놀래켜 줄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어느덧 광민이 멀리서 보일 만 한 거리가 되어간다. 그런데 광민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하였지만 아무 일 있을 리 만무하였으므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우리가 있던 곳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광민은 거기에 없었다. 목청껏 불러 보았지만 대답도 없다. 길 위로 올라와서 다시 소리쳐 불러 보았다. 내가 목청껏 광민을 부를 때마다 광민이 지금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하게 내 귀를 통해 들어와 가슴을 저며 놓는 것만 같았다. 소리 지르기를 당분간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가 건너려고 했던 자리 근처로 가서 광민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도 내가 몇 번이나 건널까 망설이며 확인했던 징검다리라 그 지점을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광민은 아주 현명한 사람이고 우리가 헤어졌던 곳으로 반드시 돌아올 거라는 확신을 가지려고 애썼다.


생각해 보니 나에겐 시계도 없다. 우리가 헤어진 시간을 대략 2시라고 생각하고 지금부터 최소한 시간에 대한 감각을 알 필요가 있었다. 잘 모른다는 것은 불필요한 공포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침착하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 셋.. 내 목소리가 이번에는 내 귀를 타고 내 마음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한번 씩 광민을 불러 대었다. 혹시라도 나를 찾으며 불안해할 광민이 조금이라도 빨리 안심할 수 있도록. 하지만 그때마다 광민이 지금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다. 숫자가 100이 되면 돌을 한 개 놓았다. 이 돌이 10개가 되기 전에 광민이 돌아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0개가 넘어도 포기하지 않고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는 결심도 같이 하였다. 그러다가 나와 광민이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던 요 며칠 혹은 몇 달간 이 혹시 꿈 속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이 미쳐가는 과정을 깊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데체 광민이 이곳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광민은 내가 건너기 편하게 징검다리를 더 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물살이 너무 세므로 난 위쪽으로 올라가며 새로운 징검다리나 건너갈 수 있는 곳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자 나를 찾으러 왔는데 만날 수 없었다면 계곡 길이 아닌 찻 길로 올라가서 계곡에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한 곳에 있다는 것은 산속으로 많이 올라갔다는 결론인데 우리는 이미 돌아갈 포인트에 와 있었으므로 계속 나를 찾아 올라간다는 것은 어불 성설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 자전거로 지나가는 남자들이 보였다. 그들에게 설명을 해서 광민을 보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달라고 부탁할 까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건 더 위험한 사태를 촉발할 수도 있다. 난 광민이 여기에 올 때까지 무사히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보니 광민이 여기서 갑자기 누군가에게 납치당하지 않는 이상 이렇게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주변국을 괴롭혀서 제국을 만들었던 터키의 과거 제국의 역사나 현재의 불안한 터키 국제 정세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아침에 핸드폰을 가져오지 않았던 장면이 클로즈업되면서 영화의 불행한 암시로 느껴지고 자꾸 마음이 힘들어진다. 지난 며칠 동안 유난히 행복했던 순간들이 눈 앞에서 영화처럼 떠오르며 그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내게서 멀어져 간다.


하지만 이 곳은 산 속도 아니고 복잡한 시내도 아니고 시야가 넓은 평평하고 넓은 산기슭 큰 길가다. 여기서는 어떤 사고가 날 위험도 존재하지 않고 광민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확신을 계속하며 숫자를 세었다. 그리고 두 개째 돌을 올려놓으며 두려움을 참고 다시 한번 광민을 부르려고 일어서서 길 가 쪽을 보는 순간 저쪽에서 광민의 옷자락이 보인다. 이번에는 눈을 통하여 가슴이 미어진다. 갑자기 힘이 풀린 다리는 광민에게 향하지 못하고 바위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쏟아지는 눈물을 막아본다.


광민은 내가 건널 수 있는 곳을 찾는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10분 이상 나를 기다리다가 내가 돌아오지 않자 나를 찾아 나섰고, 돌아가는 길 쪽으로 2킬로나 다녀왔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에서 내가 화가 나서 혼자 가 버렸던 경험만 없었더라도 이 곳에 있었을 거라고 말하며 내 머리에 알밤을 주며 반성문 10장을 쓰라고 한다.(화가 났던 것은 맞지만 그때도 난 혼자 가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할 곳에 먼저 간 것뿐이었다.) 난 맨 발로 강을 건너는 것으로 때우자고 말하고 양말을 벗고 강을 건넜다. 너무 시원하고 상쾌했다. 차가운 냇물에 족욕을 하고 나니 오히려 발이 훈훈해지는 게 피곤이 회복되는 것 같았다.


계곡 건너 등산로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아서 수풀이 우거져 걷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자동차들이 지나다니지도 않고 쓰레기가 없어서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광민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행복했다. 덤으로 우리는 오렌지도 많이 얻었다. 전 날 바람이 많이 불어서 떨어진 것 도 몇 개 주었는데 아예 뿌리가 뽑힌 나무가 계곡에 떨어져 있었고 거기에 싱싱한 오렌지들이 몇 개 달려 있었다. 오면서 4 개정도 먹었는데 집에 와서 세어보니 10개나 된다. 지금 책상 위에 먹다 남은 오렌지가 어제의 일들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냄새를 풍기고 있다.


20190109_114400.jpg
20190109_112454.jpg
20190109_124549.jpg
아직은 천국일 때
20190109_130403.jpg 나를 지옥으로 이끈 작은 개울
20190109_153549.jpg 지옥이 만들어 준 천국

힘든 기억을 하며 긴 일기를 쓰다 보니 피곤해진다. 오렌지 하나 먹으면서 쉬어야겠다.


밖에 아스팔트 곳곳에 차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물보라를 일으킬 정도로 고였다. 그래도 야자수 잎들이 바람이 없다는 걸 내게 알려주고 햇살도 조금 비추기 시작하니 오늘도 점심 먹고 외출해야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쪽파같은 양파, 마늘같은 쪽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