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들의 배경 무대가 된 이천 년 전의 도시 흔적들
1년간의 캠핑카 여행을 다녀온 지 2년 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 겨우 반을 썼다. 포기하지 않고 다 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남은 기간은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으니 꼭 정리하고 싶긴 하다. 포기하지 않고 한 발 한 발 아스펜도스 원형극장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심정으로 부족하지만 오늘도 하나의 일기를 정리해 본다.
2019년 2월 20일 수요일
떠나기 전엔 언제나 맘이 힘들지만 다행히 난 여행 체질인 것 같다. 하루 종일 걸었는데 하나도 피곤하지 않다. 인버터를 켜야 해서 일기 쓰기가 좀 부담스럽긴 하다..
안탈리아 시내를 벗어나니 경유값이 좀 싸져서 다행이었다. 우리는 안탈리아 시내에서 남서쪽 방향에 있는 고대 팜필리아(모든 종족의 땅)에 있는 세 도시 아스펜도스, 패르게, 시데 중에서 페르게를 제외한 두 도시에 가기로 했다. 이 지역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흔적이 있는 곳이고 기원전 1200년 전부터의 유물 유적이 있는 곳이다. 로마 지배하에 있던 1~2세기에 중요한 건축물이 세워지고 5세기경 가장 번성했다고 한다. 평원의 풍부한 물자와 해안지역이라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대부터 점령하고자 하는 쟁탈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아스펜도스 원형극장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물탱크며 냉장고등 아톰 배를 든든히 채우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아스펜도스의 원형극장이었다. 2천 년 전 로마의 마르크수 아우렐리우스 시절에 지어졌다고 한다. 기존의 원형극장들과 달리 화려한 입구 건물이 완벽하다. 지진 등의 피해가 없어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극장으로 들어갈 때 진짜 공연을 보러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무대 입구뿐만 아니라 객석 뒤편까지도 2천 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고스란히 지키고 있었다. 두 단으로 이루어진 객석은 까마득히 높다. 두 번째 여행의 시작이기도 해서 고소 공보증을 조금이나마 극복해 보려고 용기를 내어 원형극장 꼭대기까지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끝까지'라는 목표를 생각하지 않고 '한 발 한 발'만 생각했다. 내 나쁜 습관~ 미래를 너무 걱정하는 ~을 고쳐보려고 했고 성공했다.
고생 끝에 올라간 무대 위쪽엔 천정이 높은 아치형 회랑 기둥들이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어디를 봐도 좋은 그림이다. 어린아이를 무등 태운 아빠가 가파른 계단 끝에서 아슬아슬 사진을 찍고 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났지만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용기를 내어 광민이 원하는 장소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본능적으로 난간에서 멀리 떨어져 안전해 보이는 극장 뒤편에 눈을 돌리니 창살 사이로 예쁜 들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중에 만날 들꽃 천지 들판을 이 때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창살 사이로 그 들꽃들을 찍느라 애쓴 것이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그리고 다시 극장 아래로 내려오는 길. 생각보다는 무섭지 않았는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자꾸만 손에 땀이 난다.
극장 맨 아래 객석 중 양쪽 가장자리에는 등받이에 이름까지 적혀있는 귀빈석이 있다. 우리도 귀빈이 되어 앉아본다. 그러다 문득 이 극장의 '소리 전달력'이 궁금해진다. (이 극장은 지금도 공연을 하고 있는데 객석 뒷자리까지 대사가 잘 전달되어 '신기한 명소'로 알려져 있다.) 앞뒤로 울림통이 잘 만들어져서 음향효과가 좋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관광객들이 계속 있어서 노래를 마음껏 불러보지는 못했다. 사람들이 뜸해졌을 때 조금 시도해 봤는데 역시 음향효과 면에서 그리스의 에피다우로스처럼 완벽한 곳은 없는 것 같다.
공연도 제대로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극장 옆으로 난 길을 통해 극장 뒤 편에 있는 아고라와 바실리카들이 있는 유적지로 향한다. 가는 걸음마다 점점 많아지는 들꽃에 마음을 빼앗겨 발걸음이 자꾸 느려지니 느긋한 성격의 광민이 재촉한다.
언덕에 올라 주변이 한눈에 들어올 땐 탄성이 터졌다. 영화 속 한 장면이다. 원형극장이나 드넓은 유적지들과 들꽃의 어우러짐. 누군가 미리 알고 기획한 것 같다.
광민이 꽃밭에 앉는다. 난 벌레라도 있을까 봐 기겁을 했지만 괜찮다며 앉아보라는 말에 잠시 앉아 보았다. 햇볕을 잘 받아 꾸덕꾸덕하게 마른풀들이 지푸라기처럼 두툼하게 깔려있어 방석처럼 포근하고 따뜻하다. 천국이다. 이천 년 전의 도시 흔적들은 이제 들꽃의 배경 무대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들꽃 사이 옛 터들을 누비며 많은 상상을 나누었다.
옛날에는 멀리 보이는 바다에서 근처의 강까지 배가 들어왔고 덕분에 이 도시는 무역으로 번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광민이 늘 말하듯이 예전엔 물길이 지금의 고속도로였으니 내륙이 강으로 이어지는 해안을 가지고 있었던 이곳을 얼마나 많은 권력들이 탐했을지 짐작이 간다. 이 지역은 은화를 최초로 주조했던 도시 중의 하나고 당시 사용되던 은화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니 부자도시였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다른 아고라며 거대한 신전들까지 다 무너졌는데 원형극장만은 거의 그대로 보존된 이유가 무엇일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극장의 역사를 찾아보니 시대에 따라 다른 쓰임새로 쓰였다. 낙타와 행상들을 위한 숙소가 되기도 했고, 성전이 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잘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잘 보존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려오는 길에 들꽃으로 화관을 만든 아주머니가 천천히 내려오라고 친절하게 말하며 사진 찍기를 권한다. 저렇게 예쁜 화관을 쓰고도 예쁘지 않으면 속상할 것 같다며 찍지는 않았다. 그래도 화관이 너무 이뻐서 좀 더 구경하고 만드는 방법이라도 물어보고 싶은데 광민은 또 나를 재촉한다.
시데에서 만난 아폴론
아스펜도스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했는데도 시데까지 이동거리가 가까워서 해가 지기 전까지 근처 마을과 유적지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곳은 바닷가에 바로 인접해 있어서 아고라 유적지들과 해안의 절경들이 어우러진 모습이 매력적이다. 더구나 유적 지안에 마을이 그대로 있어서 입장료도 없다, 길목에 늘어선 카페들은 유적지와 어우러지는 인테리어로 여행자들을 이천 년 전의 세상으로 안내한다. 그 신기한 환상열차 같은 공간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보니 뚜렷한 7자가 보여서 순간 깜짝 놀랐다. 나는 전혀 볼 수 없던 것을 카메라가 저 혼자 인식한 것이다.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마당에 바다에서 벌써부터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나의 두 번째 여행을 더욱 설레고 신나게 만든다. 추운 날씨 때문에 숙소에서 5일을 더 연장했지만 내륙의 추위가 아직 조금 걱정이었는데 수영하는 사람들을 만나니 괜히 안심된다. 광민에게도 겉옷을 벗으라고 했다. 한 겹짜리 얇은 옷으로도 따뜻한 날씨다. 오늘 마지막 따뜻한 날씨를 마음껏 즐겨야 한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내일부터 다시 기온이 떨어진다.
아고라로 들어가는 문이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듯 신기하다. 그리고 그 문을 나섰을 때 또 탄성이 나온다. 남아있는 몇 개의 기둥만으로도 충분히 우아한 아폴로 신전. 파란 하늘이 더 파래 보이고 하얀 기둥이 더 하얗게 보인다. 바다와 어우러지고 구름과 어우러져 언제 어느 방향으로 보아도 아름답다.
아고라를 나와 오던 길에 보았던 터키 간식과 차로 휴식을 취했다. 토르티야 안에 치즈와 허브를 넣어 구워주는 것인데 내가 만드는 과정에 흥미를 갖고 칭찬해 주자 주인아저씨가 나에게 자기 쪽으로 와서 사람들에게 선전해 줄 것을 요구했다. 난 웃으며 지나가는 한국 사람에게‘맛있어요’라고 한 마디 해 주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음식을 먹고 있는 생면부지 나를 장사에 동원시키는 게 무례하게 여겨졌다. 주인장이 무례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삶이 절박했는지 그도 아니면 터키의 문화가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에너지를 보충했지만 아직 우리가 찾고 싶은 것이 있었다. 빵가게였다. 여행을 나서기 전 음식은 충분히 만들어 왔는데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빵은 쉽게 구할 수 있을 줄 알고 준비하지 않았었다. 우리 상식으로는 터키의 주식이 기본적으로 빵이기 때문에 작은 마을이어도 어딘가 한 군데 빵을 파는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을을 구석구석 살펴도 빵 파는 곳이 없다.
그러다 우리는 마을 뒤편까지 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한 중년 남자가 전망 좋은 곳이 있다며 우리를 안내한다. 원형극장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우리를 데려다 놓고 바로 사라졌다. 그러나 아스펜도스의 절경을 이미 보고 온 상태라 탄성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에서 내려와 원형극장의 입구 건축물을 보았을 때 또 한 번의 탄성이 터졌다. 역암 거석들로 이루어진 외관은 콜로세움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웅장했다.
그나저나 이제 마을을 완전히 한 바퀴 돌았는데도 빵가게는 없었다. 우리는 꿩 대신 닭처럼 견과류가 들어있는 터키 젤리 한 상자를 샀다. (가격 대비 만족하지만 차로 돌아와 먹으려고 상자를 열었을 때 아기 주먹 하나만큼의 작은 젤리 덩어리를 보고는 터키의 겉치레 문화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만난 아폴론 신전은 노을빛에 또 다른 환상적 자태로 한 번 더 발걸음을 붙잡았다. 광민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지역이 아폴론의 고향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가 아폴론을 잉태한 레토를 시기하여 모든 땅에게 그녀가 해산할 곳을 내어주지 못하도록 명령한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아폴론은 장성한 후 자신의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 델피로 가서 용을 무찌르고 델피를 차지한다. 이것은 아폴론이 그리스 이외의 지역에서 유입된 것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신화에서는 델로스에서 왔다고 되어 있으나 델로스는 원래 떠돌아다니는 심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어디서 온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추론을 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델로스 동맹은 에게 헤와 소아시아의 도시국가들 사이에 맺어진 동맹이고 이 과정에서 아나톨리아의 토속신인 아폴론과 레토가 그리스 신화의 일원이 되었다는 가정을 세워볼 수 있다. 이제 아폴론이 그리스의 태양신이면서도 적자로 태어나지 않게 신화가 만들어졌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렇게 우리 멋대로 해석해 보고 상상하는 재미 속에서 새로운 여행의 매력이 생겨난다.
우리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유적지 마을 해안가인데 낚시하는 애들 서 너 명과 모닥불 피우는 젊은이들 대여섯 명이 노을과 함께 아름답다. 자연만 있을 때 보다 거기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