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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미 탐험가 이숙경 Oct 03. 2021

세르비아

헤어지는 연습

2019년 3월 15일, 16일


니슈에서 시작한 세르비아 여행은 좋은 기억들로 가득하다. 

편안하고 예쁜 숙소와 친절하고 맛있는 식당들은 모두 가격이 착했다. 

니슈에선 편안하고 안락한 곳에 머물며 쉬는 여행에 쉼표를 만들었다.
니슈를 지나  다시 시작된 여행. 평온하고 목가적 풍경이 이어졌고, 봄에 스키를 탈 수 있는 한 겨울을 만나기도 했다.


스투덴차 수도원

 큰 길에서 보이는 스투덴차수도원, 수도원  전경, 수도원 안 카페.

마침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도착해 있었으나 우리가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하는 사이 모두 떠났기 때문에 우리는 조용하게 수도원을 방문할 수 있었다.  수도원 안은 아주 정갈했고 먼저 들린 화장실은 무료로 개방되어 있었는데 쾌적했다. 많은 관광객이 드나드는 곳인데 이렇게 무료로 깨끗하게 관리가 되다니 놀랍다. 반쯤 문이 열린 교회로 들어서서 10디나르(우리 돈 100원이 조금 넘는다.) 짜리 초에 불을 붙였다. 교회 안을 구경하고 있는데 목에 명패를 매단 한 남자가 영어로 안내를 해 주겠다며 다가왔다. 망설이는 우리에게 웃으며 무료라고 말한다. 감사히 그의 안내를 받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교회는 버진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졌고, 세르비아의 초대 교회 중의 하나라고 한다. 비잔티움 프레스코화에 대한 설명도 해 주었는데 긴 수염에 꽈배기 머리칼로 옷을 입은 수도사, 세 명의 가는 다리 수도사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리스 정교의 수도사들은 인도의 고행자들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저렇게 육체를 왜곡시켜가면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저들의 깨달음들이 쌓이고 모아진 덕분에 인류가 조금 착해졌을지도 모른다.


안내자와 헤어지고 교회에 딸린 건물에 들어가니 안내 데스크가 있다. 차를 주문할 수 있다고 하는데 가격 표시가 없다. 안내하는 청년이 가격은 무료라고 한다. 내고 싶으면 기부금 통에 넣으면 된단다. 차와 커피를 주문하고 카페로 들어갔는데 우리 둘 뿐이다. 잠시 후 아름다운 청년이  따끈한 차와 커피를 가져왔다. 정성이 가득하다. 한 고금 마시니 여행의 피로가 확 풀리는 기분이다. 성당들을 돌아다니며 느끼지 못했던 진짜 신의 안식이 느껴진다.


무료 화장실, 무료 가이드, 무료 카페까지. 묵을 곳이 필요한 나그네는 잘 곳도 제공받을 수 있는 것 같았다. 

나그네에게 천국이다. 동네 사람들이 낸 성금으로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사람들이 갑자기 천사로 보인다.


되돌아 나올 뻔한 마을 식당


저녁에 수도원 근처에 식당이 한 군데 있어 들어갔다. 좀 어둡고 어수선한 분위기. 한쪽에 맥주를 마시는 시커먼 남자들이 담배까지 피운다.  되돌아 나오고 싶었지만 광민이 바로 자리를 찾아 앉는다.  그런데 그들에게 음식을 가지고 나온 주인장의 유쾌한 웃음소리와 밝은 목소리에  한 순간  조명을 켜놓은 듯 식당이 환하게 밝아진다. 그들의 오가는 대화가 갑자기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무슨 얘기를 주고받는지 알아들을 것만 같은 기분이 신기하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니 오래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올 것 같다.


세르비아에 들어온 지 일주일쯤 되니 이제 쪼끔 주문이 익숙해진다.  세르비아 전통요리에 속하는 콩요리, 생선국(피시 차우더)과 치즈크림이 들어간 그릴, 그리고 빵을 주문했다. 맛있는 데다 먹고 남을 만큼 넉넉한 양에 우리 돈  8600원 정도다, 특히 빵은 니슈의 시내(200원) 보다 비쌌지만 (300원) 가치가 있었다. 손바닥만큼 큼직한 데다 만지는 순간 따스하고 아기 볼처럼  살짝 푹신한 느낌.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화 같은 분위기 때문에 내일도 오기로 했다.


거의 매일 보는 노을인데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이곳에서 보는 마지막 노을이기 때문이겠지

2019년 3월 16일


아침부터 가족 외식?

새벽에 6시도 안됐는데 날이 밝았다. 마을은 벌써부터 푸르스름한 굴뚝 연기가 가득하다. 어제 식당 주인이 6시부터 문을 연다고 해서 긴가민가 했는데 진짜 일찍 아침을 준비하는 분위기다. 우리는 먼저 수도원 산책을 하기로 했다. 문이 닫혀 있을 거라고 광민이 걱정했지만 일찍부터 사람들이 한 둘 씩 교회로 오고 있다. 토요일이라서 일찍부터 예배가 있는 것 같다. 나도 예배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광민이 반대해서 그냥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생각보다 사람들이 꽤 있었다.


테이블에는 새 리넨이 깔려 있고 교회 간다고 사람들이 차려입어서인지 어제저녁 선술집 같은 풍경은 사라지고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다.  우리는  오믈렛과 세르비아 샐러드를 주문했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는데 치즈가 한 덩이씩 들어있고 내가 좋아하는 빵도 주었다. 샐러드는 그릭 샐러드와 기본적으로 비슷한데 양파를 더 잘게 잘랐고 덩어리 치즈 대신 치즈 가루를 뿌렸다. 그릭 샐러드의 큰 양파가 좀 부담스러웠는데 나는 세르비아 샐러드가 더 먹기 편한 것 같다. 푸짐한 상을 받고 기분이 좋아졌다. 음식을 거의 다 먹을 무렵 커피도 주문했는데 터키 젤리 하나를 요지에 끼워서 주었다. 그것도 기분 좋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식당에 손님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우리가 나올 때쯤엔 거의 바글거리는 수준이었다. 식당은 가족석이 많고 아주 넓은 편이었는데 8시 정도에는 발 디딜 틈도 없다. 이른 아침 가족과 교회에  다녀오는 길에 혹은 다녀 가는 길에 함께 외식하러 온 것 같다.  우리한테 흔치 않은 '아침 외식 풍경'이 참 재미있고 신기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나서 따로  빵을 사 가지고 가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동네 주민도 이 집의 빵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식당은 이 동네 유일한 식당이면서 맛집인 것 같다.


이별 연습

아침을 먹고 광민은 차를 청소하고 나는 수도원에 한 번 더 다녀오기로 했다. 이왕 가는 길이니 찬찬히 다시 한번 수도원을 살펴본다. 어제도 아주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아침 훨씬 더 예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사진을 찍어 놓고 비교해 보아도 현저히 그렇다. 사진은 찍는 사람의 마음이 드러난다더니 진짜일지도 모르겠다. 한 걸은 한 걸음 내 눈앞에 있는 광경들을 빠짐없이 잘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돌아오는 길 촛농을 모으러 다니는 청년이 나를 아는 척하면서 기념품 가게문을 열어 주겠다고 한다.  마침 지갑을 가져오지 않아서 잠시 후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이제 광민과 기념품을 사러 다시 한번 올 수 있지만 그것이 끝이다. 이제 평생토록 이곳에 다시 오기 힘들 것이다. 또 미련이 생긴다. 하루만 더 머물고 싶다. 어제처럼 수도원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정다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그러고 보면 여행이라는 것은 헤어짐의 연속인데, 난 이별이 늘 힘들다. 결국 나에게 여행은 가장 원초적인 헤어짐을 받아들이기 위한 연습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만 세 번째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래도 아쉬움은 줄어들 줄 모른다. 광민은  촛대를 골랐고 난 지향이에게 줄 대리석 마그네틱과 은영이 현득이 연숙이 세 명의 크리스천을 위해 십자가 목걸이, 동생 유경이를 위한 작은 묵주, 나를 위해선 꿀과 교회 사진이 들어간 마그네틱 등을 샀다.  이별의 보상품 들이다. 돌아오는 길에 광민에게  여기 하루 더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역시 가볍게 거절당했다. 나보다 훨씬  헤어짐에 익숙한 광민.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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