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돌아온 지 3년째에 접어들어서야 여행기의 반을 썼다. 너무 오래 걸리다 보니, 숙제를 밀린 학생처럼 조급함이 들기도 한다. 글을 읽어주는 글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한 것은 잘한 것 같다.
여행 중에 썼던 일기를 보면 기억에서 잠시 사라졌던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예상치 못했던 기억의 파편들은 나를 다시 설레는 과거 여행의 시간 속으로 텀벙 빠뜨리곤 한다. 현재 속에서 보는 과거는 상대적으로 미완성의 시간이다. 바로 앞에 벌어질 일도 모르기 때문에 여행이, 인생이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 당시의 결정, 혹은 의문들을 이렇게 편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내가 신기하기도 하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바로 지금과 같은 순간 -과거를 편안한 맘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 미래에 올 거라는 주문을 걸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순간이 마법처럼 느껴진다. 여행기를 쓰며 여행의 마지막 기쁨을 맛보고 있는 이 순간은 과거가 보내 준 선물이다.
2019년 4월 11일 오전 일기
지금은 헝가리 캐스트헤이의 대형 슈퍼 스파 앞
아침에 정박지에 있는 유료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문을 열지 않아서 가까운 슈퍼로 왔다. 슈퍼 앞에서 일기를 쓰는 것도 재밌다. 오늘은 바람이 불어서 쉬기로 했기 때문에 여유가 많다. 간단히 보충할 물건도 사고 화장실 볼일 도 보고 점심도 먹고 다시 정박지로 갈 것이다.(동유럽은 캠핑카 인프라가 흔치 않아서 차 안의 화장실 사용을 가능하면 줄여야 한다.)
4월 10일 헝가리 입국
자그래브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고 멋진 5쿠나짜리 주차장을 떠났다. 대형슈퍼가 있었지만 아침 시간에 도로가 붐볐고, 고속도로 다음에도 슈퍼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고속도로를 탔지만 고속도로에서 나오기도 전에 국경을 만났다. 고속 비를 내고도 21.7쿠나가 남았다. 어제 만일 수제햄을 사지 않았더라면 너무 아까울 뻔했다. 고속도로비도 지금까지 중에서 제일 비싼 금액이었는데 도리어 다행으로 느껴진다.
헝가리에 들어오는 입국절차는 비교적 간단했다. 이제 곧 크로아티아도 쉥겐협정 국가로 들어간다고 한다. 이제 얼마 후엔 이 절차도 없어지고 이 고속도로를 중단 없이 다니게 될 것이다. 헝가리에서는 고속도로에서 비넷을 사게 돼 있는데 10일 간 사용하는 것이 7000 포린트 우리 돈 28000원이다. 고속도로 휴게실에는 2유로에 사용할 수 있는 샤워시설도 있었고 무엇보다 반가운 부탄가스가 눈에 띄었다. 완벽하다. 샤워시설도 이용하지 않고 부탄가스도 사지 않았지만 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 만으로 마음이 여유로워진다.(부탄가스는 이곳 이외에 우리가 갔던 헝가리 모든 매장에서 다시 만날 수 없었다.)
헝가리에 들어오기 직전엔 비가 많이 오고 안개가 심했는데 헝가리에 가까워지면서 드넓은 푸른 들판에 노란 유채꽃이 만발하고 풍요로운 농촌 풍경이 나타났다. 해안가에 비해 내륙의 삶이 어려울 줄 알았는데 집집마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 살기 좋은 마을 풍경이다. 헝가리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도시는 입구부터 화려한 교회탑과 녹지대가 눈길을 끈다. 그리고 바로 보다폰 매장이 보였다. 한 달에 5기가인데 유심 가격이 둘이 합해서 3 만원이 조금 넘는다. 오스트리아에서도 안되던 카드결제도 해준다. 기분이 좋다. 헝가리는 여기저기서 잘 사는 냄새가 난다.
드넓은 공원에 주차공간이 아주 많고 조금 떨어진 호수 공원과도 비교해 가면서 가장 좋은 정박지를 고를 수 있었다. 바람이 부는 날씨라 나무가 많은 공원 쪽을 선택했고, 밤새도록 아주 아늑하게 잠잘 수 있었다.
우리는 공원을 산책하며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마을 구경을 하고 마을 한가운데 있는 궁전을 방문했다. 하얀 튤립으로 장식한 화려한 정원이 왕궁의 권위를 뽐내고 있었다. 궁전 안에 박물관이 있었는데 종류별로 다른 가격대의 다양한 볼거리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100일간의 발칸 여행을 하고 계시다는 두 부부를 만났다. 우리보다 10년 정도 더 연배가 있으신 분들인데 두 달간 여행하셨다고 한다. 그중 한 부부는 뉴질랜드 남 섬 북섬을 캠핑카로 여행한 경험도 있으시다며 우리 차를 궁금해하셨다. 캠핑카 여행이 힘드셨겠다고 하니 커다란 캠핑카라서 다 준비되어 있어 힘든 점이 없다고 하셨다. 우리 차가 작아서 많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뉴질랜드는 캠핑촌이 발달되어 있고, 캠핑촌에 주로 정박할 경우는 할 일이 많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캠핑촌을 거의 들어가지 않으니 조금 더 어렵게 여행하고 있는 셈이다. 우린 아직 젊으니까.
2019년 4월 11일 오후 일기
여행 스케줄 대지진-할까 말까 헝가리 여행
여행 계획을 세울 때마다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던 내가 엊그제 자다르에서 만난 영국에서 살고 있는 가족과 폴리트 비체 국립공원에서 재회하며 영국 여행을 제의했고, 어제 만난 두 쌍의 부부들의 여행을 보면서 이번엔 아예 스케줄을 바꿔보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살고 있는 가족의 얘기를 들으니 영국은 국립공원과 대부분의 박물관이 무료인 데다 캠핑시설이 좋아서 여행하기 좋다고 했다. 광민도 그 생각을 받아들여서 20일 정도 여행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열심히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페스테틱스 궁전에서 만난 두 부부의 자동차 여행을 생각하다가 우리의 여행에 대한 문제점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 부부들은 4월에 시작해서 100일간 발칸 지역을 여행을 한다고 했다. 가장 선선하고 좋은 계절이고 성수기를 살짝 피하니 가성비 좋은 계획인 듯싶다. 그러나 성수기를 피한 다는 것은 너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돈이 많이 드는 가장 큰 이유는 숙소 비용과 외식 비용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집이 있다. 우리의 여행 계획을 잘 생각해 보니 지금 선선한 계절에 선선한 지역을 다니다가 더운 여름에 더 더운 스페인으로 간다는 문제점이 크게 떠올랐다.(지금 생각해보니 좀 더 빨리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 같다.)
언제나 철없는 제안을 해서 광민을 혼란에 빠뜨리기 일수라 나는 먼저 지도에서 스페인까지의 거리를 짐작해 보았다. 생각보다 꾀 가까이에 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스페인과 포르투갈 쪽을 먼저 가자고 제안해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광민이 엄청 힘들어한다. 자그래브쯤에서 이런 제안을 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거라고 했다. 그래도 오늘 하루 동안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코 앞에 두고 방향을 바꿔야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로 했다. (세계지도는 실제보다 가까운 곳을 멀게 혹은 먼 곳을 가깝게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광민이 말하길 지구가 둥글어서 생기는 문제라고 했다.)
고민 과정에서 방향을 되돌려 지중해를 거쳐 프랑스 남부에서 스페인 포르투갈 다시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가는 방법과 아예 스페인 포르투갈을 제외하고 영국에서 북유럽을 가는 방법, 심지어 영국에서 핀란드 쪽으로 이동하여 러시아를 다시 통과하는 방법까지 얘기했다.
헝가리에 들어온 지 하루 만에 다시 오던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게 될 것인가? 앞으로 우리는 어떤 여행을 하게 될 것인가? 나조차 너무 궁금해진다.
2019년 4월 1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어제저녁 많은 의논 끝에 더 많은 시간을 여유 있게 보내기 위해 독일에서 배를 보내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귀국하기로 했다. 지금부터 여행 경로를 완전히 바꿔져서 광민이 할 일이 많아졌다. 광민은 또다시 일정을 바꾸지 않으려고 독일에서 배를 보내는 날짜까지 정하고 현대상선에 매일을 보내 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우리의 일정에 포함될지도 모르는 베니스에 관한 유튜브 영상을 시청했다. 아름다운 베네치아가 아주 매력적으로 나오는 영상과는 달리 소개하는 분의 설명이 오히려 매력을 반감시키고 있었다. 가령 가장 대표적인 화가의 이름을 세 명 꼽으면서 정작 그들의 작품의 배경이나 특성 영향에 관해선 가치로운 설명이 없고 새로운 호기심을 가질 근거가 없다. 그러다 문득 난 우리가 방향을 바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 가기까지 너무 먼 거리를 무의미한 주행이 계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여행을 설계하기 전에 광민이 나에게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꼭 가야 하는가에 대해 물었고 난 당연히 볼거리로 가득 찬 두 나라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진짜 원하는 머무는 여행이 어려울뿐더러 많은 여유가 사라진다. 지도를 살펴보니 우리가 그동안 거쳤던 지중해의 비슷한 풍경을 또다시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광민에게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제외하자고 했다. 그랬더니 광민은 그 대신에 북유럽을 갈 수 있다고 했고 난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다. 하지만 노르웨이 같은 나라는 스위스처럼 언제 아찔한 산길을 만날지 모르는 터, 그런 나라는 빼자고 했다. 우리는 자동차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프로그램으로 다시 여행 계획을 짰다. 아니 원래 광민이 구상했던 대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도 이번엔 내가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이 있었으니까 부부가 진정한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내 생각에 자동차 여행, 특히 캠핑카 여행은 얼마나 많은 곳을 다니느냐 보다 얼마나 살기 좋은 곳에, 혹은 멋진 곳에서 충분히 머무를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어제오늘은 꽃샘추위인지 날씨가 쌀쌀하다. 게다가 바람도 제법 분다 하지만 우리는 부다페스트 도시 한 복판에 히터가 훈훈하게 나오는 집 안에 있다. 맛있는 점심을 맛있게 먹었고 광민은 나른한지 곤한 잠에 빠져있다. 운전도 힘들었을 것이고 헝가리에 들어오기 전 후로 내가 여행 경로에 대해 몇 번씩이나 계획을 뒤집는 이야기를 계속했으니 많이 피곤했을 것이다. 내가 너무 즉흥적인 사람인 반면 광민은 세밀하고 차분한 성격이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까 걱정된다.
그래도 내가 오는 동안 차 안에서 폭풍 검색을 통해 부다페스트 카드를 사는 방안을 알아냈고( 나는 핸드폰을 보면 어지러워서 평소엔 거의 보지 않는다.) 우리가 앞으로 여행해야 할 일정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부다페스트 카드는 교통카드는 물론 배 이용로와 온천 1회 무료 이용권에 1일 2회 워킹투어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비용이 저렴한 편이다. 이제 헝가리 여행은 내가 책임져 봐야겠다.
하지만 독일에서 배를 보낸 것 외엔 거의 모든 것이 다시 바뀌었다. 20일 정도 예상했던 영국 여행은 스코틀랜드까지 포함해서 40일간 했고, 도로가 위험할까 봐 가지 않겠다던 노르웨이에는 북유럽 국가 중 가장 오래 머무른 나라가 되었다. 파리를 비롯한 유럽이 더위로 몸살을 앓던 2019년 여름에 우리 부부는 가장 시원한 여름을 보냈다. 독일에서 배를 보낸 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물론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까지 한 달간 여유롭게 배낭여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