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내리지 않은 곳에서 내린 날

짝퉁 아이거와 진짜 아이거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린데발트에서 지낸 사흘

IMG_8738.JPG 숙소 맞은편에 있던 산봉우리
IMG_8739.JPG 교회 맞은편에 별이님네와 나란히 서있는 아톰이 보인다.


IMG_8606.JPG 그린데발트에서 바로 보이는 짝퉁 아이거


그린데발트의 작은 교회 앞에서 며칠 동안 여유 있게 스위스의 명품이라는 융프라우 지역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아이거처럼 봉우리가 있어서 어떤 것이 진짜 아이거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생각해보면 비슷한 생김새의 바위들이 많은데 그 크기가 좀 더 크거나 혹은 각이 좀 더 절묘해 보인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참 많은 집착을 하는 것 같다. 온통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인 스위스에서도 아주 유명한 아이거나 마터호른을 보고야 말겠다는 사람들이 몰리는 덕분에 스위스의 산악 열차 값은 매우 비싸다. (스위스는 입장료가 필요한 유적지가 별로 없다. 여행경비의 대부분은 교통비였고 그중에 대부분이 산악열차 비용이었다.)


융프라우 지역에 있는 그린데발트는 꼭대기에 작은 호텔들과 레스토랑 쇼핑몰이 가득 차 있었는데 메뉴판의 가격을 보면 간단한 파스타도 가격이 만만치 않다. 가끔씩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슈퍼에서 산 닭다리를 뜯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젊은 여행객들이 제법 싸늘한 날씨에 밖에서 간단한 점심을 때우기도 한다. 우리도 간단한 식재료를 사려고 쇼핑몰에 들렀다가 젊은 한국 여행자들을 만났다. 물가 비싼 스위스에서 싸고 좋은 방을 얻었다며 외식은 비싸서 요리 재료를 사서 직접 요리할 거라고 한다.(유재품이나 빵은 우리나라보다 상대적으로 싸고 좋아 보였다.) 우리 딸이 생각나서 함께 따뜻한 밥 한 끼 먹자고 하고 싶었지만 그들의 자유로운 여행에 방해가 될까 봐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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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발견하고 너무 좋아한 라면코너.

둘째 날엔 근처에서 버스 타는 법을 알아내서 멀리까지 나가니 사람들이 사는 진짜 마을이 나온다. 내가 바라는 것은 관광지의 멋진 장면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모습이다. 스위스가 얼마나 잘 사는 나라인지는 별로 상관없다는 듯 일상의 풍경은 너무도 소박하다. 필라투스산에서 사흘 동안 쏘다니며 익숙해졌는지 소똥 냄새조차도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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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곳에서 버스타기에 많이 익숙해졌지만 언제나 많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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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히 만나는 인형 장식이 기분좋고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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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에는 주로 여름에만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름집들이 있다.



작은 교회 앞에 있는 우리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바라다보이는 짝퉁 아이거는 아무리 보아도 진짜와 늘 헷갈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꼭 진짜 아이거를 보러 가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정상에 가지 말자


그래도 힘든 운전을 한 남편을 위해 셋째 날 진짜 아이거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대신 정상까지 오르지 않고 가장 가까이에서 아이거를 볼 수 있는 곳에 내리자고 했다. 아이거가 아름답다면 아이거의 정상보다는 아이거가 잘 보이는 곳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낫고, 위로 올라갈수록 더 추워져서 풍경을 즐길 여유가 없어질 거라 생각했다.


열차에서 내린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우리는 걸을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 보기로 했다. 깨끗한 눈을 밟으며 조금 올라가다 보니 갑자기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황홀한 장면은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나는 탄성을 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주변의 산들과 아이거를 담은 호수는 멈추는 자리마다 다 다른 그림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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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한 호수


호숫가엔 예쁘고 아담한 집이 있었는데 비상시 피난소 역할을 하면서 이 지역의 길이 만들어진 역사를 알리는 홍보관이었다. 험한 산지를 조금씩 개척해서 길이 만들어 지기까지의 시간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길은 항상 누군가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험한 산길은 몇 배 더 힘들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 덕분에 내가 지금 이 길 위에 있다.


밖으로 나와 나무 벤치에서 싸가지고 온 간식을 먹는데 새들이 같이 먹자고 식탁에 끼어든다. 덕분에 우리 식탁이 심심하지 않다. 점심을 먹으며 산 꼭대기를 바라보니 열차가 올라가는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정상 바로 밑엔 거의 수직으로 굴이 나 있어서 열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나의 예상대로 올라갔던 열차들은 금방 사람들을 태우고 다시 내려온다. 점심을 먹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여기에 다시 내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덕분에 아이거가 담긴 커다란 호수는 온통 우리 차지였다.


맑은 새소리만 들리고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하면서 눈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따스한 이 곳에서 오랜만에 요가를 해보고 싶어 졌다. 그런데 요가를 시작하자마자 갑자기 몸이 점점 따뜻해진다. 두터운 옷이 거추장스러웠다. 하나씩 벗었는데 기분이 너무 좋다. 열차에서 사람들이 내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다른 열차가 오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결국 시원하게 웃옷을 모두 벗어버렸다. 추위에 엄청 약한 내가 흰 눈 덮인 설산에서 시원하게 옷을 벗다니... 새들처럼 노래도 부르고 나비처럼 춤도 추었다. 자유롭다. 이렇게 마음껏 자유로울 수 있는 내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는 짝꿍과 함께라서 더 행복하다. 스위스의 설산은 차가움이 아니라 따스하고 시원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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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9_122949.jpg 호수에 담겨 있는 진짜 아이거.



정상에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이 내 말을 듣고 중간에 내려준 것이 참 고마웠다.(설득하는데 시간은 좀 걸렸었다.) 대신 남들과 다른 곳에 내린 덕분에 아찔하고 짜릿한 추억을 선물로 받았으니 남편도 고맙게 여길 것이다.


저녁엔 베른 호수에서 헤어졌던 별이님네와 다시 만났다. 따로 또 같이할 동반자가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시옹 성과 마터호른을 거쳐 스위스의 마무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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