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선물한 보볼리 정원
11,20, 화 저녁 9시 14분
아침 일찍 떠나기 전 수로 주변을 산책했다. 끊어진 수로의 흉측한 모습이 역사의 시련을 토해내는 듯하다. 그래도 이곳은 하루 동안 우리에게 안식처였다. 대도시로 가기 전 이렇게 편안하고 아늑한 곳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피렌체 첫날(2018,11,19)
시내에 정박하려고 도착한 캠핑카 주차장엔 벨도 없고, 개시된 번호로 전화를 걸면 '지금 연결이 안 되니까 나중에 다시 전화하란' 메시지만 반복되었다. 고심 끝에 막다른 골목길 끝에 있는 이 주차장 입구에서 일단 아침을 먹고 자리를 옮기기로 하였다. 심란한 마음을 추스르고 막 아침을 준비할 무렵 주인이 나타났다. 주차비는 20유로라고 했다. 예상보다 5유로 더 비싸다. 와이파이가 되고 전기와 물을 쓸 수 있다고 했다. 전기와 물이 필요 없다고 했지만 가격은 마찬가지라고 했다. 원래는 이틀 예정이었지만 화장실 샤워실은커녕 쓰레기통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가격만 비싼 이곳에서 하루만 머물기로 했다. (1년간 여행하면서 만난 최악의 캠핑카 주차장이었다.)
아침은 비가 오는 쌀쌀한 날씨인 만큼 따끈한 고추장찌개를 준비했다. 든든히 먹고 간식도 넉넉히 준비해서 출발했다. 그런데 광민은 날씨가 나쁘다며 불평한다.(광민은 불평이 거의 없는 사람인데 여행 중 대도시에만 들어오면 많이 예민해졌던 것 같다.) 오스트리아 스위스에 이어 어제까지 그렇게 좋은 날씨로 다녔는데 너무 욕심이 과하다. 우산 없이 우비로 다닐 수 있을 만큼 오는 비가 그나마 감사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씩씩하게 다닐 수 있는 건강이 우리한테 허락되어 있는 현실 또한 고맙기 그지없다. 이런 날씨에도 일찍부터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도시에서 시절 좋게 놀러 다니면서 불평을 한다면 죄스러운 일이다.
피렌체는 3일권이 1인당 78유로라고 했다.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 비해 두 배이면서도 그리 즐길 거리가 많은 것 같지도 않아 우리는 대성당이나 우피치 정도만 방문하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그러나 여기도 대성당은 줄이 길어 포기. 우피치도 줄이 길었지만 광민의 정보에 의하면 아침일찍이 아니면 아예 오후 늦게 가는 것이 좋다고 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점심도 먹고 쇼핑센터에 가서 구경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결정한 메뉴는 피자.(이탈리아에 와서 벌써 일주일이 지나도록 피자를 먹지 않았다.] 골목을 누비며 찾다가 가격도 적당하고 작고 아담해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입구만 작았을 뿐 안으로 들어가니 매장 안이 호화스럽다. '우리가 가격을 잘못 보았나?' 매장엔 각종 요리 대회의 우승 상장이 걸려있고 호화스러운 화덕에선 맛있는 피자 냄새가 난다. 어차피 들어왔으니 그냥 먹어보기로 결정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화장실에 갔는데 화장실도 호텔급이다. 공공시설은 갖추지 못했어도 역시 이탈리아 화장실 수준이 높구나 생각했다. 계산할 때 보니 우리가 가격을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생각보다 더 쌌다. 두 가지를 주문했는데 음료수까지 4.6유로. 거짓말 같은 가격이다.( 이렇게 싼 집은 전무후무였던 것 같다. 맛은 좀 심하게 짰다.)
다음은 우리가 평소에 관심을 갖지 않던 쇼핑센터에 가보기로 했다. 좋지 않은 날씨 덕분에 선택한 장소지만 생각해보면 거기야말로 생활 속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물건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상하기 위해 보는 것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비싼 물건들을 마음속으로 맘껏 쇼핑하고 나서 그것을 안 산 덕분에 돈을 번 느낌도 가질 수 있다. 고급 쇼핑센터엔 비싼 물건이 가득 차서 돈을 아주 많이 벌 수 있었다. 특히 아기 옷 매장에 많이 머물렀는데 우리도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가 왔나 보다.
그러다 화장실을 찾게 되었는데 무슨 일인지 이 넓은 쇼핑센터에 화장실이 없다. 그러나 그동안 쌓인' 화장실 찾는 기술'덕분에 결국 찾아내었다. 특이하게도 여성 속옷 판매장을 통해 화장실에 가게 되어 있었는데 화장실은 엄청 지저분했다. 내 기준에만 고급일 뿐 이 쇼핑센터는 시장 수준인지도 모르겠다.
2시 반쯤 미술관에 도착했을 때는 2시간 전에 비해 조금 줄이 줄어들어 있었으나 단체 예약 관광객이 끊임없이 밀려들어와 4시가 넘어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이 너무 힘들어 보였다. 이 긴 줄이 우피치의 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4유로의 예약비를 낸 사람들과 현장 입장객의 차별이 너무 심하다. 여기는 놀이공원도 아니고 하물며 미술관인데 말이다. 러시아를 시작으로 동유럽을 거쳐 오스트리아, 스위스에 이르기까지 이런 태도는 처음 겪는다. 예약을 한 사람들과 현장 입장을 하는 사람들이 따로 줄을 서고, 예약을 한 사람들이 절차가 그만큼 간단해져서 빨리 입장할 수 있도록 조치하면 될 것이다.
그래도 우피치 미술관에 간 건 잘한 일이다. 비 오고 쌀쌀한 날씨이기도 했고, 다른 미술관보다 재미가 있었다. 다른 미술관들이 주로 성화를 보여준데 비해 세속권력의 뒷받침을 받은 덕분인지 화가들의 시선이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옮겨오는 과정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작가 별로 전시되어 있어서 작가의 의식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에 대해서 우리끼리 해석해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비 온 뒤 맑은 피렌체 11월 20일
어제 비가 온 덕분에 맑은 하늘과 따뜻한 햇살이 더 고맙다. 어제 광민은 날씨 때문인지 도시가 자신을 누르는 기분이라며 떠나고 싶다고 했지만 오늘 이런 날씨를 미리 알고 있었기에 난 반대했다. 광민이 평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정원을 구경하기 딱 좋은 날이다. 맑은 날씨만큼 광민의 기분도 한결 가벼워 보인다. 아톰을 안전한 곳에 세우느라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아직 아침햇살이 충분히 남아 있는 이른 시간에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몇몇 관광객이 보이긴 했지만 거의 우리 독차지다. 아기자기한 숲길인가 싶으면 커다란 광장이 나오기도 하고 도시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이 이어지는 동안 광민의 해설이 유익하고 재미있었다. 건축물을 통해 , 정원의 설계를 통해, 사람들을 지배하고 세뇌시키는 방식을 실제 공간에서 설명을 들으니 머리에 쏙쏙 들어오고 흥미로웠다. 지배자는 신의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높은 곳에 궁을 세웠다. 그리고 아래로 세상을 내려다보며 시선의 권력을 장악했다. 시선은 직선으로 지배자를 향해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멀리서 보이던 산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실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지배자는 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신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정원에서 한참을 보냈다. 어제 우리들이 돌아다니던 도시를 바라보며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피렌체와 만나는 순간이다. 표정이 환해진 광민을 보니 내가 이 정원을 선물한 느낌이다. 마음에 안 드는 곳이라도 조금 더 머물고, 발걸음을 더하면 좋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아톰과 남편이 노력한 덕분에 피렌체에서 가장 편안하고 좋은 시간을 놓치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여행 좋아하는 딸 선영이한테 전화가 왔다. 근처에 스테이크 맛집이 있다며 돈을 보낼 테니 꼭 먹어보라고 했다. 말만으로 참 고맙다. 스테이크가 아니어도 새로운 여행지로 출발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