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지역 산 지미냐노에서 와인을 사지 못한 이유
11,21. 산 지미냐노
대도시를 지나 시골길이 나오면 훨씬 마음이 편해진다. 넓은 평야와 구릉지대에 끝없이 펼쳐지는 포도밭은 스위스의 절벽 포도밭에 비해 훨씬 풍요로워 보인다. 우리는 그 풍경 한가운데 한적하고 편안한 곳에 집을 세웠다. 큰길에서도 멀고, 넓은 축구장과 뒷 산으로 이어지는 텃밭이 우리를 아늑하게 감싸는 자리다. 우리 집 앞마당으로 나와 보니 질퍽한 텃밭에 가을걷이하고 남은 토마토들이 아직 탐스럽다. 그리고 몇 걸음만 걸어가면 가지가 휘어지게 큰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가 있다. 이곳은 사과나무 대신에 감나무들이 많이 눈에 띄어서 궁금했는데 바로 눈 앞에 열매가 풍성한 감나무를 만나니 기분이 좋다.
이제 우리의 목적지인 성으로 가는 길. 작은 세탁소며 미용실을 기웃거린다. 우리한테 모두 필요한 것들이다. 지금 당장 하지 않더라도 우리한테 필요한 것들이 있으니 괜히 뿌듯하고 든든해진다. 그리고 드디어 성이 나온다. 비가 오는 날이라 사람들이 많지 않아 더욱 호젓한 기분이 들고 자연스럽게 중세로 들어가는 착각에 빠진다. 이제 이 좁은 길을 올라가면 틀림없이 구도심의 넓은 광장이 나오고 거기엔 성당이 있을 것이다. 예상대로 우리가 도착한 곳엔 넓은 광장과 성당이 있었지만 내 눈 길을 끄는 건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탑들이었다.
나: 저 탑들은 우리가 그동안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광민: 옛날 부자들이 자기가 더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서로 계속 더 높은 탑을 쌓았대. 그러다 너무 경쟁이 치열해져서 더 이상 높은 탑을 쌓지 못하도록 기준을 만든 탑이 있어.
나 ;(웃음 터지며,) 진짜 유치하다.
광민:지금도 도시마다 서로 경쟁하듯 높은 빌딩을 짓고 있잖아,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속엔 자라지 못하는 아이가 있나 보다.
작은 마을이라서 작고 아담한 성당을 생각하고 와서인지 더욱 크고 웅장해 보이는 성당이 날 보란 듯 서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기둥이 빽빽하다. 그 기둥들은 높이만큼 하늘을 향한 권위로 보인다. 내가 많은 기둥의 숫자에 관심을 가질 무렵 광민이 이 성당이 다른 곳과 다는 점을 찾아볼 수 있겠냐고 묻는다. 몇 가지 되는 대로 말을 했지만 기억도 안 난다. 게임을 하듯 지지 않으려고 별로 생각 없이 한 말이므로..
그리고 광민이 다시 말한다. 이 기둥들의 문양이나 모양이 하나하나 다르잖아. 그러고 보니 이렇게 많은 기둥의 문양 모두 조금씩 혹은 많이 저마다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광민은 이렇게 새로운 것을 잘도 찾아내서 내가 더 재밌게 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참 장하고 기특한 나의 동반자..
내려오는 길에 들른 전망대에선 우리가 지나 온 포도밭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런 한가한 풍경 속에 며칠 있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우린 바로 앞에 집이 있다. 이 아름다운 곳에 내일 한 번 더 온다는 기대가 없다면 진짜 발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 같다. 내려오는 길, 거리에 하나 둘 불빛이 켜지니 더욱 아름답다. 와인가게와 도자기 가게들이 우릴 유혹했지만 어차피 내일 한 번 더 올 것이니 그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고 집으로 향한다.
다음 날 아침 성으로 들어서는 순간 더욱 활기가 느껴진다. 마을길에 서로 지나치며 나누는 인사들 웃음들이 보인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어딜 가나 관광객만 주로 보이던 것과는 다른 이런 풍경이 중세도시를 더욱 생생하게 만든다. 그리고 어제보다 더 산뜻한 모습으로 단장한 상점들의 예쁜 물건들이 오늘도 어김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특히 토스카나 특유의 화려한 도자기 가게는 내 발길을 자꾸 붙잡고, 광민은 와인가게 앞에서 자꾸 걸음을 멈춘다. 난 없어지지 않고 계속 남는 물건에 관심이 있고 광민은 어딜 가나 그곳의 와인 맛에 관심을 가졌는데 여긴 와인의 주산지 토스카나이니 당연하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아끌며 언덕길을 계속 올라간다. 그런데 우리가 도착한 곳엔 예상하지 않은 장이 서고 있었다. 여행 중에서도 시장 구경을 특히 좋아하는 나는 탄성을 지른다. 그중에서도 너무 마음에 드는 사과가 눈 앞에 보인다. 예전 라트비아의 민박집 사과처럼 붉은 자줏빛에 크기는 훨씬 더 크다.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고 내려가는 길에 다시 들르기로 하였다.
어제보다 아름다운 빛깔로 풍경이 나를 유혹했지만 내 마음속엔 사과로 이미 꽉 차있었다. 그렇게 멋진 사과를 보면 누구나 반할 수밖에 없어서 금방 다 팔리고 말 것 같았다. 간단히 어제의 복습을 마치고 얼른 사과장수에게로 갔다. 다행히 아직 남아 있다. 비싸도 무조건 사려고 했는데 가격도 너무 착하다. 저 앞에 젤라토 챔피언 가게의 젤라토 하나 값에 진짜 세계 챔피언 사과가 한 보따리다. 마음이 부자가 돼서 이번에는 오랜만에 꼬치구이 가게도 줄을 서본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어 청년 셋이 손 빠르게 일을 해도 줄이 줄어들지 않고 고기는 동이 날 지경이다. 다행히 우리 몫을 받을 수 있었다. 따뜻한 고기가 든 봉지가 제법 묵직해 더 기분이 좋아진다
다시 우리 앞에 예쁜 도자기 가게며 와인가게가 우리를 유혹해 보지만 이미 사과와 고기로 짐이 무겁다. 광민이 와인가게 앞에서 좀 버텼지만 무리라며 내가 또 손을 잡아끈다. 생각보다 집으로 오는 길이 멀었고 오는 내내 와인 안 사길 참 다행이라고 공치사를 하며 광민의 아쉬움을 달랬다.
집으로 돌아와 사과 맛을 보니 최고다.(이때부터 여행 내내 이 종류의 사과만 먹었다. 마트에서의 가격은 세 배정도 비쌌다) 꼬치구이도 스테이크 수준이다. 간식으로 생각했는데 든든한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빛나는 감을 그냥 두고 갈 수 없다. 딱 두 개 땄는데 푸짐하다. 바람님이 떫을 거라며 걱정했지만 보기만 해도 얼마나 좋은가? (우리는 이 감을 이탈리아 여행을 마칠 때쯤 아주 맛있게 먹었다)
토스카나의 풍성한 마지막 가을 자락을 차에 가득 싣고 다시 또 다른 마을로 출발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더 높은 탑을 쌓을 때마다 낙담하거나 더 높이 쌓겠다고 다짐하던 몇 백 년 전의 사람들의 진지한 모습이 떠오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다음 마을은 나에게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