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보다 조연


11월 19일 월요일 이침 9시 54분, 피사 외각


슈퍼마켓인 줄 알고 내린 곳은 작은 카페를 겸한 잡화점이었다. 일종의 휴게소 같은 곳.

이탈리아에 온 지 6일째이지만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지 못한 채로 지내고 있다. 이제 차에 남은 것은 햄과 약간의 야채들. 그것들을 이용해서 점심을 먹고 피사 나들이를 할 계획이다. 그래도 오늘 저녁엔 장을 볼 수 있다. 오다가 봐 둔 마켓이 있다. 나들이가 끝나면 정박지에 가기 전에 들르기로 했다.



저녁 일기


주연보다 조연


피사의 사탑을 보러 기적의 광장으로 향했다. 주차장부터 기념품이나 우산을 파는 이민자들을 많이 마주친다. 이어지는 길목마다 기념품이 즐비한데 가격이 싸다. 러시아에서부터 사던 마그네틱을 폴란드에서부터는 가격이 비싸져서 더 이상 사지 않기로 했는데 갑자기 러시아만큼 싸진 마그네틱을 사야 하나 망설여진다. 게다가 피사의 기울어진 탑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목적지로 향했다.(끝내 마그네틱은 사지 못했다. 기회는 대부분 지나간다.) 우리 앞에 거대한 성문이 나타나고 그 안을 들어서자 비현실적인 모습의 탑이 보이기 시작한다.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의 아름다움이 갑자기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느낌이다. 이탈리아 여행 사진을 대표하는 건축물이고 그래서 오직 그것을 보러 왔지만 기대를 넘어선다. 방금 전 무수한 마그네틱을 통해 그 모습을 미리 보면서 왔는데도 불구하고 상상을 뛰어넘어 전혀 새로운 세상에 와 있는 착각마저 든다.


한참을 넋이 나간 듯 탑을 바라보고 나서야 두오모의 자태에 눈이 간다.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두오모의 자태는 기대를 안 한 덕분인지 눈부시게 아름답다. 피렌체의 두오모에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관심은 두오모보다 탑에 집중되어있다. 왜일까?


다른 종탑들에 비해서 훨씬 웅장하고 높으며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지만 두오모에 비길바는 아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내 눈에는 두 건축물이 배우로 보인다. 당당한 주연으로서 무대를 차지한 주인공과 한쪽 끝에 있을망정 자기만의 개성으로 더욱 돋보이는 조연.


나를 포함한 관객은 확실히 주연보다 삐딱한 조연에 관심이 쏠린다.


IMG_9748.jpg 주연이 된 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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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을 서지 않고도 두오모에 들어갈 수 있었고, 사탑을 장식한 작은 조각들이 나의 상상력을 자극 시켰다.


다시 광장을 나와 한적한 성 뒤로 나오니 몇 천년 전 목욕탕으로 쓰이던 패사지가 나온다. 이렇게 한적한 곳에 있으면 바로 저 담 뒤로 무수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고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런 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참 좋다. 이런 곳이야 말로 우리가 오래된 시간 속으로 빠져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길은 다시 시장 골목을 통하여 아톰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머릿속에 여기에 오기 전까지 존재 자체도 관심이 없었던 주연 두오모와 삐딱한 주제에 주연을 가려버린 조연, 그리고 먼 시간 속으로 순식간에 날 데려갔던 폐사지들이 계속 떠오른다.(그러느라 마그네틱은 머리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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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들이 쌓여가면 나는 어떤 건축물이 되어가는 걸까?


마트에서 다시 냉장고와 야채 박스를 채우고 저녁도 든든히 먹고 나니 황혼이 아름다운 시간이다. 큰 도시에 들어가기 전엔 우리는 늘 냉장고를 채우고 편한 휴식을 취하는데 오늘 우리 집은 오래된 수로가 있는 곳이다.

올리브나무 숲이 넓게 펼쳐진 이곳은 오가는 사람들도 거의 없이 한적한데 우리에겐 지상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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