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뜬 장님들

파비아에서 아웃렛 매장으로


2018,11,17 파비아에서 아웃렛 매장으로


'북쪽의 로마'라 불리는 파비아에서 짧은 일정을 마치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크고 화려한 아웃렛 매장이다.(이 아웃렛 매장 이름은 '세라발라' 일기를 쓸 당시엔 이름을 알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이곳은 파비아 등 북부 소도시들과도 가깝고 밀라노와 제노바같은 큰 도시의 딱 중간 지점이다. 각 도시의 큰 호텔들과 연계하여 관광객이 당일 코스로 쇼핑할 수 있도록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 여기는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한창 들떠있다. 우리는 드넓은 아웃렛 주차장에서 한참이나 걸어 매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각종 유명 브랜드들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지만 우리한텐 무용지물이다. 우리는 유명 브랜드 앞에선 둘 다 눈 뜬 장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멋진 쇼윈도에 진열된 남자 구두들이 착한 가격(5만원 내외)으로 심하게 나를 유혹한다. 광민은 한 켤레의 신발만 고집해서 한 켤레 사가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필요 없다는 대답. 우리가 찾는 식품매장을 찾아 목적을 달성하면 그 후에 다시 오리라 마음먹고 아쉬운 발걸음을 뗐다.(광민은 언제고 자신의 물건을 살 때 대부분 순순히 사겠다고 한 적이 없다. 거의 내가 반 강제적으로 협박을 해야 겨우 사곤 한다. 당시는 그런 에너지를 쓸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작은 도시들을 여행하느라 주로 대도시 입구에 있는 대형마트를 며칠째 가지 못했고, 오늘 점심때 가지고 있는 모든 재료를 소진했다.


그런데 아픈 다리를 이끌고 이리저리 헤매어도 정작 우리가 찾고 있는 식품매장이 나오지 않는다. 유럽은 어딜 가나 식품매장이 일 순위였는데 어디에도 없다. 혹시나 해서 아웃렛 지도를 살펴보았다. 지도는 한국어와 중국어로 돼 있었다.(일본어로 된 지도는 없었다. 이곳도 역시 한국 관광객이 대세다. 그럼에도 이탈리아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일본어나 중국어로 인사를 건넸고 내가 한국어로 대답하면 생소해했다.)그러나 모두 각각 브랜드의 이름을 딴 매장 이름만 나왔을 뿐이다. 브랜드 이름을 모르는 우리는 다시 한번 까막눈 신세.


그래도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크고 넓은 쇼핑몰에 식품매장이 없다는 건 말도 안된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집중하는 내 눈에 음식물이 들었음직한 쇼핑 봉투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침 광민도 같은 시점에 이렇게 넓은 장소에서 어떤 기준으로 방향을 정해 탐색에 나서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두 사람이 생각하는 방향이 정 반대라는 것이다.


광민은 더 짧은 곳을 다녀오는 것이 후회 최소의 법칙에 맞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내 판단의 근거가 훨씬 구체적이라며 굽히지 않았다.


논리를 내세우는 꼰대와 직관으로 맞서는 찌질이의 싸움 끝에 결국 찌질이 승!

길게 뻗은 매장의 대열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거의 맨 마지막 다다랐을 때 드디어 '식품이 들어있음 직했던 쇼핑가방'의 정체가 나타났다. 역시 내 직관이 맞았다며 찌질이는 의기양양.


그러나 기쁨도 잠시. 막상 들어가 보니 내가 찾던 식품매장이 아니다. 어디에도 신선식품이 없고 심지어 기초적인 유제품이나 식빵도 없다. 힘들고 지친 마음에 실망과 위기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동안 내가 계속 마트를 찾아야 한다고 했는데도 광민이 여행 계획에만 너무 집중하느라 내 말에 좀 더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는 원망이 올라왔다. ( 이후에도 내 불안했던 예지력이 맞아서 마트를 만나기 어려웠고, 이탈리아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나고서야 제대로 된 식료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착한 꼰대에게 결국 사과를 받아내고서야 속상한 찌질이의 화가 좀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왕 온 김에 새로운 식재료 탐색을 해보겠다고 다시 즐거운 마음을 내어 보았다. 마른 양념들을 비롯해 다양한 모양의 파스타도 사고 평소라면 절대 사지 않았을 케이크이며 단 빵들을 한 보따리 샀다. ( 이것들은 나머지 이탈리아 여행의 간식으로 훌륭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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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아울렛 매장에서 우리가 건저낸 보물들.


아웃렛을 나와 '아톰'으로 돌아오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많은 매장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물건을 고를까?

우리가 장님인 게 다행인가 불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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