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6일 월요일 로마에서 더 멀어진 로마
아침 일찍부터 티볼리 역 근처에 있는 빌라 데스떼를 구경하고 아드리아나에 도착했으나 아쉽게도 마감시간이라 입장은 못했다. 친구가 적극 추천해준 곳이었지만 빌라 데스떼에서 너무 시간을 많이 썼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드디어 로마로 입성했다.
티볼리에서 로마 테르미니 역까지는 30분이 걸렸는데 30여 킬로를 더 가까이 달려 로마에 왔는데 오히려 로마 시내까지 시간이 두 배가 더 걸린다고 한다. 참 아이러니하다. 그래도 티볼리 역에서 보다 아침 일찍부터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으니 내일은 가능한 한 일찍 움직이려고 한다. 출퇴근 시간에 걸리면 고역이라는 경험담을 읽었다.
오늘은 저녁 식사 후 조심스럽게 이를 닦았는데도 신경이 잘못 건드려졌는지 엄청 아팠다. 염증이 잇몸에 퍼져서 아픈가 보다. 인터넷을 뒤져보며 얻은 결론이다. 터키까지 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심한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얼얼하게 아픈 느낌이 아주 가시지는 않는다. 문제는 조금씩 심해지는 것이다. 광민을 힘들게 하지 말아야 할 텐데...(점점 더 심해져서 이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터키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잘 쉬었더니 저절로 많이 좋아졌고 터키 치과에서 잘 치료하여 다행히 이를 보존할 수 있었다.)
광민은 피곤한지 벌써 잠이 들었다. 내가 아픈 이와 곰팡이 제거에 관한 정보를 뒤지는 동안 주차장 정보 정리하느라 피곤한 모양이다. 나도 그만 자야겠다.
11월 27일 화요일
바티칸 안에 바티칸 박물관이 없어요?
어제 계획한 대로 아침 일찍 서둘렀지만 도착하고 싶었던 시간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우피치 박물관에서 줄 서기의 고통을 맛보았기 때문에 입장시간 전에 도착하고 싶었다. 마치 힘든 전쟁을 치르러 가는 전투병의 자세로 간식과 물도 가방에 잘 챙겼다. 이제 일상이 돼버린 여행 속에서 이런 날은 근무를 서는 기분마저 든다. 주변의 많은 해설가이드 들이 호객을 하고 있다. 줄을 서지 않고 들어갈 수 있다는 달콤한 제안을 걸아오지만 우리에게 통할리 없다.(우리는 모아놓은 돈을 전부 털어 여행경비로 쓰고 있는 대책 없는 조기 은퇴부부. 돈을 벌지 않는 대신 쓰지 않고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제 세상에서 제일 작은 나라 바티칸이 코 앞이다. 그런데 호객하는 가이드들이 우리가 가려는 방향과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우리가 가는 길이 맞는지 조금 의심되지만 그냥 전진. 드디어 바티칸에 도착했다. 그러나 넓고 넓은 광장에서 갑자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저 쪽에 줄이 보인다 길지도 않고 다행이라 생각하며 가려는데 광민이 나를 막아선다. 거기는 검색대이고 표를 파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침착한 광민이 아니었다면 허탕 치고 돌아왔을 뻔했다. 하지만 안내판을 자세히 읽고 있는 광민이 맘에 들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긴 줄의 악몽으로 마음이 급한데 한가하게 정보를 스스로 찾아내려는 모습에 속이 터진다.
작은 안내소가 보이고 우리처럼 길을 묻는 사람이 있다. 난 무작정 그리로 간다. 급한 마음에 그 사람 뒤를 쫓아가려는 심산이었다. 어차피 그 사람도 우리처럼 바티칸 박물관에 왔을 테니까. 하지만 얘기하는 것을 들으니 바티칸 박물관이 아닌 다른 곳을 묻고 있다. 그냥 쫓아갔으면 큰일 날 뻔. 내 차례가 되어 박물관 위치를 물으니 안내소에서는 엉뚱한 말을 한다. 여기서 다시 나가서 다른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곳까지 꽤 긴 거리를 걸어왔는데 그걸 몽땅 다시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까 길거리에서 호객하던 가이드들의 선의를 무시하고 온 것이 잘못이었다. 다시 되돌아 가는 길 옆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다른 때 보다 더 많아 보인다. 그만큼 관람객이 많은 거란 추측으로 맘이 죄어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긴 줄을 만났다. 우리가 선 줄 옆으로 유료화장실을 비롯해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먹거리 장사들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생 꾀나 했을 것 같다. 더운 날 한 낮이었다면 더욱 그랬을 것 같다. 그런데 의외로 줄은 금방금방 줄어들어 검색대를 통과했다. 이제는 표를 살 차례, 그러나 모두 가이드 동반 입장표만 팔고 있다. 다시 물어물어 2층에 있는 개별 입장 매표소를 찾아갔다. 가이드 동반 매표소는 찾기 쉬운 1층에 아주 여러 개 있었고, 개별 입장권을 파는 곳은 이렇게 구석진 곳에 한 군데밖에 없으니 성수기였다면 사람들의 소문데로 엄청 줄을 설 뻔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오히려 우리 같은 개별 입장객이 별로 없어 줄 서는 일 없이 더 빨리 표를 살 수 있다. 생각지 못한 행운에 또 한 번 기분이 좋아진다. 게다가 여기에는 한국어 오디오 해설도 있어서 자유롭고 알차게 관람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로마에서 만난 이집트
아무 정보 없이 시작되는 나의 여행에 늘 뜻밖의 장면이 펼쳐지곤 하는데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러시아를 시작으로 곳곳에 박물관이나 조각상들을 많이 만났었고 얼마 전에 우피치 박물관에 바로 어제 데스데 정원에서 온갖 그림과 조각품을 만나고 왔건만, 이집트 미술관에 들어서면서 입이 딱 벌어진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많은 지를 생각하면 어서어서 앞으로 나가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내가 지금 놀라고 있는 것은 내 머릿속 이집트의 이미지가 금이가고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원 후 지금까지 보다 훨씬 더 먼 기원전에 만들어진 물건 앞에 있다는 것만 해도 감격스러운 일인데 이런 거대하고 완벽한 조각상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영화에서 미라관을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따뜻하고 예쁜 색감인 줄 알지 못했다. 작고 정교한 조각품들로부터 석관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내 발걸음을 잡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어릴 때 크리스마스 때마다 틀어주는 모세라는 영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이집트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미개하고 야만 적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스며들었던 것 같다. 모세가 지팡이를 대자 우상을 믿는 그들의 강이 빨간 피 빛으로 물드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런데 내 앞에 있는 이집트의 문화는 눈이 부시다. 기원전 몇 천 년 전 태양신을 향해서 기구하는 그들의 모습이 오늘 나한테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집트관에서 생각 밖으로 시간을 많이 지체했지만 나의 여행 동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것으로 대 만족.
우리는 사람들이 유명하다는 작품들 앞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가끔씩 미술관 창밖으로 보이는 로마 시내를 구경하기도 했다. 싸가지고 온 간식도 먹고 카페에서 열량 보충도 해가며 행진에 행진. 성 시실리아 성당이 또한 번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어제 데스떼에서 화려한 건물과 그림을 보고 왔지만 다시 일순간에 머릿속이 다 지워지는 현상. 성당은 사람들로 꽉 차있다. 천지창조를 비롯해 낯익은 그림들이 숨은 그림처럼 숨어있어서 찾아내는 재미가 있지만 생각보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그러기에는 우리 둘의 다리가 너무 지쳐있다. 거의 빈틈이 없던 성당 둘레에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얼른 가서 지친 다리를 쉰다. 그리고 수많은 천장 벽화며 그림들, 그리고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우리는 꽤 오래도록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광민은 천장 벽화를 보며 이렇게까지 힘들게 벽화를 그려야 했던 이유를 궁금해했다. 난 벽화나 그림들이 예수보다 구약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서로 궁금증을 나누고 해석하는 사이 다리도 피곤이 풀린다.
이제 해가 저물 때까지 남은 시간이 길지 않지만 우리를 보챌 가이드가 있는 것도 아니니 다시 여유롭게 성바오로 대성당으로 향한다. 이제 곧 우리의 퇴근 시간이다. 크고 화려한 성당을 볼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 예수님은 정말 저렇게 화려한 것을 좋아하시나? 근무를 마치고 대성당을 나오니 아름다운 노을이 또 나를 설레게 한다. 흰색 기다란 열주들과 어우러진 모습이 장관이다. 지금은 미술관도 조각품도 아닌 저 아름다운 노을이 이곳의 주인공이라며 바티칸의 마지막 작품을 마음껏 즐겼다.
그리고 퇴근길 지하철 역 노점상에서 아주 마음에 드는 와인병따개를 찾아냈다. 드디어 와인 한 잔 하고 푹 잘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