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준 선물

로마 첫날.


11월 25일 일요일 하루 종일 비, 로마 첫날.


새로운 우리 집에서 하룻밤이 지났다. 우리 집 앞 작은 강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바로 로마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는 티볼리 역이 나온다. 관광객보다 현지인들의 삶을 볼 수 있는 이런 마을이 마음에 든다. 그러면서도 로마 테르미니까지는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니 얼마나 좋은 장소인가. 비 소식이 있었지만 기차 타러 갈 때까진 우비를 입지 않고도 갈 수 있는 만큼만 비가 왔고, 차창 밖으로 파란 하늘도 조금씩 보여서 내심 맑은 로마의 모습을 기대해 보았다. 하지만 로마 역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로마 한가운데에 도착할 무렵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황급히 우비를 입었다. 그런데 광민의 우비는 머리 부분이 너덜거리는 바람에 자꾸 벗겨져서 옷이 다 젖는다. 새 우비를 사든 지 우산을 사든 지 하자고 했지만 광민은 괜찮다며 나의 제의를 계속 거부했다.


비를 맞으며 도착한 벼룩시장도 기대하던 일요 마트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는 자신들이 쓰던 물건을 가지고 나온 소박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고 신기하게 생긴 물건들을 구경하고 싶었다. 그곳에서 기념품도 고르고 필요한 와인병따개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곳은 가죽제품이나 모피 같은 것이 주를 이루는 일반 재래시장이었다.


시장을 나오다 맥카페가 보여서 우선 들어가 보기로 했다. 여행 중에 맥카페는 즐거운 만남이다. 우리에게 쉴 곳과 화장실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이번에 들어간 곳은 아담하고 사람들의 줄도 많지 않아서 큰 맘먹고 커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유럽에서는 커피를 달라고 하면 작은 잔에 에스프레소를 주는 경우가 많아서 조금 더 비싼(다른 가게에서는 분명 더 비쌌다) 카푸치노를 주문했는데 빵이 함께 서비스로 나가니 고르라고 한다. 게다가 가격이 1유로라고 한다. 그렇잖아도 앞의 할아버지가 주문 목록에 없는 종류의 빵을 받는 것을 보고 궁금했었다. 난 초코 머핀을 주문했고 혹시나 내 귀를 의심해서 2유로를 냈는데 1유로를 거슬러 준다. 너무 감사하다.


로마 역 화장실 사용료가 1유로인데 따끈한 카푸치노에 달콤한 초코머핀이 1유로 라니! (이후 로마의 다른 맥카페에선 이런 경우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더구나 맥카페는 화장실을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다. 난 이곳이 마음에 들어서 점심까지 먹으며 오래도록 있고 싶었다. 차에 가면 비가 와서 문도 열어놓지 못하고 답답하게 있어야 하는데 쾌적한 이 곳에서 여행에 관해 조사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민은 계속 돌아가는 기차 시간을 알아보며 가자고 한다. 그러다 좀 더 조사를 해 보겠다던 내가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바티칸이 무료입장이라는 것을 알아내자 광민이 얼른 점심을 먹고 가자고 했다. 원래 로마에 오기 전에 내가 알아놓았던 건데 깜빡 잊었었다. 이번에도 생각 밖으로 싸고 맛있고 따뜻한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신나서 돌아왔는데 광민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한다. 마감이 12시 30분이라고. 그땐 12시였다. 그래도 2.3유로짜리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고 아직 비가 많이 오는데도 맥카페를 나왔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나니 냄새가 너무 역겨웠다. 힘들더라도 맑은 공기 속에서 걷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광민이 내리자고 제안한다. 난 얼른 동의했다..


우리가 내린 곳은 콜로세움을 비롯한 로마의 명소들이 다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하지만 난 계속 광민의 찢어진 우비가 신경 쓰였다. 빗줄기가 굵어질 때마다 어떻게든 비를 맞지 않게 해 보려고 신경을 쓰지만 곤 소용이 없어진다. 우비를 새로 사거나 우산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날씨가 포근해서 잠바의 모자와 우비의 모자를 이중으로 쓰고 있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그때 마침 우비 우산 장수가 눈에 띄었다. 우산은 10유로 우비는 3유로라고 했다. 내가 비싸다며 그냥 가자 우비는 2유로에 우산은 8유로까지 해 준다고 했다. 난 기대도 없이 5유로라고 말했다. 아까 우산이 얼마면 살 거 같냐고 내가 물었을 때 광민이 5유로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그러다 광민이 돌아보았고 내가 광민과 의논하는 모습을 본 우산장수는 우산을 7유로에 주겠다고 한다. 이제 우산의 가격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여기서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산장수와 광민의 눈치를 번갈아가며 보다가 우산장수에게 마지막으로 6유로라고 말하자 우산장수가 못 이기는 척 깎아주었다. 아마 내가 태어나서 가장 많이 물건값을 깎은 날이 될 것 같다. (우산장수 아저씨 미안하고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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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들고 있는 광민이 흡족하고 당당해 보인다.

커다란 우산이 생기니 여간 뿌듯하지 않다. 아까부터 우산을 든 사람들이 너무도 당당하게 걷고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 우비를 입은 데다 커다란 우산까지 쓰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오는 비가 반갑기까지 하다. 6유로짜리 우산을 쓰고 여기저기 구석구석 당당하고 즐겁게 돌아다녔다. 마음이 편해지니 점점 더 아름다운 로마가 여기저기 나타난다. 그리고 한가하게 어느 작은 골목 막다른 길에 있는 성당에도 들어가 보고 마침 조용히 울려 퍼지는 성가를 들으며 참 편안한 시간도 가져 본다. 커다란 우산 덕분에. 그리고 이 우산을 살 수 있게 내려 준 비가 오히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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