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30 금
오른쪽 창 밖으로는 가끔씩 기차가 지나다니고 왼쪽은 큰길 너머에 바다가 보인다.
오늘은 햇살이 참 좋다. 가끔씩 바람결에 훅 바다 냄새가 난다.
이탈리아에 온 지 17일째 로마를 떠나 나폴리를 제치고 폼페이를 지나 바리까지 와있다.
로마에서 폼페이로 가던 날은 아침 일찍 출발해서 고속도로에서 아침을 준비하는데 휴게소 탐색을 나갔던 광민이 즐거운 소식을 가져왔다. 깨끗한 무료화장실이 있으며 샤워장도 열려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행색이 지저분해지고 있던 참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샤워장에 갔는데 안에 변기와 의자 세면대 그리고 드라이기까지 갖춰져 있었고 공간도 충분하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광민이 현금을 들고 직원에게 물어보러 갔는데 “그라치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은 감사하다는 말인 줄 알았는데 허락을 뜻할 때도 사용하나 보다.
(이탈리아는 커다란 기차역 화장실도 폐쇄 돼 있거나 비싼 돈을 받는데 고속도로 휴게실은 무료 샤워시설이 다른 나라보다 더 좋다. 고속도로 요금을 가장 많이 사용한 나라이기도하다.)
생각해보면 새로운 여행지로 들어설 때마다 어찌어찌해서 늘 깨끗한 모습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장소가 제공되어 우리 여행을 더욱 신나게 만든다. 절대 계산되지 않은, 그런데도 너무 정밀하게 계산된듯한 우리들의 스케줄을 생각해보면 더없이 감사할 뿐이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화창해서 차 청소도 좀 하고, 로마에서 했던 곰팡이 제거도 다시 한 번하기로 했다. 지금은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잠시 쉬었다가 시내 구경을 하기로 했다.
구도심은 가난한 살림살이들과 옛 영화가 느껴지는 커다란 성이며 그리스 신전 모양을 한 교회들이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기찻길 옆에 지어진 허름한 아파트에 널린 빨래들이 힘든 삶을 말리고 있고, 그나마 그 뒤에 햇볕조차 받지 못하는 아파트보다는 낫다며 우쭐거리고 있다. 길가에 널린 쓰레기들은 수천 년 전의 조상들의 문화 수준을 무색하게 만든다.
신도심은 계획도시로 몇 킬로나 되는 직선거리들이 시원하게 사방으로 뚫려있었다. 중앙역 부근은 명동만큼이나 화려했지만 조금만 외곽으로 걸어가면 비수기라서인지 문 닫은 상점들이 아주 많았다. 거리에 미심쩍어 보이는 보도불록 공사를 보며 우리나라의 과거 모습이 겹친다. 한편으로 주차단속이나 해야 하는 청년실업도 남 일 같지 않다. 그래도 저녁부터는 문을 여는 상점들이 늘어나서 낮보다는 활기가 느껴졌다. (값싼 미용실도 찾아내서 바리를 떠나기 바로 전 날 깔끔하게 머리도 자를 수 있었다.)
12월 1일 토요일 바리 2일째
바리에서 이틀째를 맞이하는 아침 어제 사온 약간 향신료가 뿌려진 손질된 닭고기로 든든히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차 바닥까지 드러내서 쓸고 닦았다. 아침에 보다폰으로 유심칩을 갈고, 기차여행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난 내심 오늘은 이곳에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날씨를 검색해 보니 다른 곳은 모두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민은 그런 식으로 하면 아무 데도 못 간다며 나를 한심하게 여긴다. 하지만 정작 비가 오거나 날씨가 안 좋을 때 맥을 못 추는 쪽은 광민이다.
어쨌거나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보다폰이 두 시간 후에야 개통된다는 점과, 오늘은 이 근방에서 바리만 비가 오지 않으니 바리를 여행하는 편이 났다는 점이 광민에게 통했다.
더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바닷가를 걸어 다니다 밴취가 있어서 간식으로 싸온 과일을 먹는데 갈매기들과 비둘기들이 우리를 노리는 눈치다. 광민이 썩은 자두를 베어내어 던지자 순식간에 갈매기 무리가 다투어 날아든다. 난 새들이 우리를 공격할까 봐 마음을 졸여가며 과일을 먹었다.(어린 시절 비둘기 눈을 보고 놀랐던 기억 때문인지 날카로운 새 부리며 눈이 너무 무섭다.) 새가 무서워 내가 일어서려는데 새가 먼저 도망간다. 아주 가까이 다가와 먹이를 노리면서도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나보다 훨씬 더 겁을 먹고 더 많이 달아난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서 겁먹는 새와 나. 설렘과 무서움이 시소를 탄다.
슈퍼에 들러 고기, 계란, 당근을 사 가지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차로 돌아왔다. 하지만 두 시간이 넉넉히 지났는데도 보다폰이 개통되지 않고 심 잠김이라는 표시가 뜬다. 여태껏 몇 번의 여행을 통해 유심칩을 갈아 끼워봤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 오늘은 토요일이라 가게 문을 일찍 닫을지도 모른다며 빨리 가자고 했다. 간단히 말했지만 이미 8킬로 이상을 걸어 지친 생태였고 자그마치 왕복 4킬로 가까이 되는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우린 작은 빵 조각 하나를 씹으며 다시 가게로 갔다.
가게에 도착하니 역시 문이 닫혀있었다. 내일은 일요일이니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자세히 보니 사람이 보인다. 문을 두드리니 손가락으로 뭐라고 가리킨다. 영문을 몰라하는 우리에게 친절한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와 이태리어로 열심히 설명해 주신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다행히 시간표를 가리키며 설명해 주시는 바람에 지금이 휴식시간이고 4시 30분부터 다시 영업이 시작됨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가게 앞 벤치에서 여행 계획에 대해 의논도 하고 동영상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광민은 가까운 알베로 밸로만 가자고 했지만 검색해보니 마테라도 너무 궁금해져서 두 군데 다 가고 싶다고 하였다. 그리스로 가는 배에서 100유로를 절약하기 위해 침대가 아닌 의자에서 밤을 지내는 고생을 하니 그 돈으로 여행을 더 하자는 내용도 말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마테라 날씨가 지금 더 좋기 때문에 가고 싶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가고 가게문이 다시 열렸다. 퉁명스러운 직원은 가게에 온 다른 손님에게 방해가 될세라 자리를 옮기게 한 후 유심카드를 다시 달라고 한다. 카드 뒷 면에 스크래치를 해서 비밀번호를 입력하게 돼있었다. 그 간단한 것을 미리 알려주었더라면 우리가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정작 직원은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한다는 태도다. 우리는 그래도 감사하다며 웃는 얼굴로 나왔다.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길 바라며..
돌아오는 발걸음이 너무 가벼웠다. 맥도널드 화장실에 들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래 3시부터 온다는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광민은 너무 여러 번 다녀서 이젠 바리 시내 지도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우리가 몇 번이나 들렀던 커다란 슈퍼 앞에 앉은 아저씨가 지나갈 때마다 알은체를 하며 '봉쥬 르노' 혹은 '차오'하며 인사를 건넨다. 저 아저씨는 누군데 계속 저기에 있으면서 우리에게 인사까지 하는 걸까? 그러자 광민이 추론한다. 슈퍼에 오는 불량배들을 감시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그러고 보니 큰 가게 앞에 덩치 큰 남자들이 있었던 기억이 있다. 만일 사실이라면 나라의 치안이 좋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은 점심을 건너뛰다시피 한 만큼 저녁은 삼겹살 버섯 구이에 데친 양배추에 쌈장, 그리고 브로콜리 무침으로 푸짐하게 먹었다.( 구이는 1인분 100그램, 국이나 찌개는 1인분 50그램 정도 먹은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여행하면서 턱없이 적은 양이었다.)
오랜만에 마음 놓고 긴 일기도 썼다. 우리를 걱정하고 궁금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소식한 번 전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다. 오늘도 억지로 한 번 머물렀지만 광민은 계속 떠날 궁리만 한다.
내일부터 또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