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에서
2018, 11,29, 목
여행 중 만난 첫서리
아침 일찍 로마를 출발해서 남쪽으로 향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맑은 하늘이다. 남쪽으로 50킬로쯤 달려왔을 때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초지가 하얀 서리로 덮여있다. 눈이 왔나? 오늘 아침 꽤 추워졌다고 느꼈는데 남쪽도 이렇게 서리가 내린 걸 보면 살짝 영하로 내려갔었나 보다. 그런데 그 서리 내린 모습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끝도 없이 이어진다. 아무리 남쪽이라도 동장군의 기세엔 어쩔 수가 없구나..
아침을 먹으려고 들렀던 휴게소에서 샤워를 하는 횡재를 했지만 젖은 머리 때문에 감기라도 들까 봐 조금 걱정되었다. 그래도 남쪽은 역시 남쪽. 폼페이로 가는 길은 더없이 쾌청했고, 차창을 열어야 할 정도로 한낮의 볕이 뜨거웠다.
운전도 쉴 겸 대형 쇼핑몰에 들러 필요한 물건도 사고 점심도 먹었다. 큰 규모에 비해 농수산물은 기대 이하였다. 우리가 사고 싶었던 자두도 없고. 정육점도 없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이윤이 크게 남지 않는 제품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사과는 역시 괜찮은 게 있었다. 10월부터 유럽여행에서는 사과가 최고 맛있고 싼 것 같다. 토마토는 사과의 두 배이지만 공산품 가격에 비할바가 아니다. 지중해 식단이 채소와 과일 위주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값이 싸니 많이 먹을 수밖에. 맛있는 과일 한 보따리에 치르는 값을 생각하면 먹을 때마다 감사할 뿐이다. 과일은 조리도 필요 없이 얼마나 맛있는가!
고통의 시간 속으로
멀리 베수비오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수 천 년 전(AD79년)에 도시를 집어삼킨 후에도 여전히 우뚝 솟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을 감추고 아름다운 자태로 내 마음을 빼앗는다. 화산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언제나 시간 속으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시간을 지옥처럼 보낸 이들의 고통은 몇 천 년을 지나도 엷어지지 않는다. 그 고통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조금 두려워진다.
유적지로 들어가 보니 로마보다 오래되었다는 이 도시의 기반 시설이 놀랍다. 그리고 이 모든 도로 시설에 쓰인 돌들이 지금까지 보던 것과는 달리 아주 크다. 가운데 찻 길로 쓰였을 것 같은 넓은 길이 움푹 들어가 있어 인도와 확실하게 분리시킨 점이 특이하다. 교통사고에 대한 대책이었을까? 아니면 비가 올 때 물이 흘렀나?
용도를 알 수 없는 길 가운데 박힌 돌이며 가끔씩 나타나는 징검다리, 그리고 가운데 찻길에 패인 두 줄의 선명한 홈을 보며 우리는 고대시대 삶의 현장을 상상해 본다.
(네이버의 어느 불로거에 의하면 징검다리는 마찻길을 사람들이 건널 때 사용하던 횡단보도라고 한다. 말들의 오물 때문에 길을 움푹 파이게 만들었던 것 같다. 두 줄의 선명한 홈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도로 양 옆으로 줄지어 있는 작은 공간들. 광민이 상점이라고 말한다. 이천 년 전에 이렇게 즐비한 상점에서는 무엇을 팔았을까? 그러고 보니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을법한 요리 도구도 보이고 계산을 위해 쓰였음직한 일정한 크기의 작은 돌멩이들도 보인다.
이어지는 마을 길을 따라 들어가 보니 화려한 목욕탕이나 정원이 딸린 귀족의 집들이 나온다. 커다란 공중목욕탕엔 옷을 벗어서 수납할 수 있는 공간까지 배치되어 그 시절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 화산은 도시를 단숨에 집어삼켰지만 또 그 재로 우리에게 과거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화산재를 품어낸 베수비오 산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에 가보니 사창가라고 한다. 나도 다가가 구경한다. 천정이 낮은 방에 유난히 작은 돌침대가 왠지 안쓰럽다. 저 시대 사람들이 모두 저렇게 작았나? 왜 여기에만 돌침대가 남아 있을까? 작은 돌침대의 소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맴맴 돈다.
마음도 다리도 조금 힘들어진다. 마침 보이는 넓은 정원 앞 벤치가 반갑다. 간식으로 싸온 사과를 먹고 버릴 수 있는 휴지통도 보인다. 힘들 때마다 새로운 에너지를 주는 나의 고마운 여행친구 맛있는 사과를 먹고 정원으로 들어가려 하니 관리인이 문을 닫으러 온다. 아직 원형극장도 가야 하는데.. 짧아지는 해 때문에 관람시간도 당겨진 것 같다.
퇴근길이 좀 아쉽지만 그래도 황홀해지는 저녁 빛을 향해 걸으니 기분이 좋다. 가뿐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 큼직한 돌 틈들이 많아 가끔씩 유모차를 들고 다녀야 하는 젊은 부모가 버거워 보이고, 미끄러운 돌길, 지팡이를 짚은 노인의 발걸음도 조금 위태로워 보인다. 우리의 과거와 미래의 모습이 한 공간에서 만나는 미묘한 순간이다.
지금이 가장 자유롭고 아직은 젊은 내 인생의 황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