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6일
간밤에 몇 번씩 높은 파도로 겁이 나기도 했지만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속도 괜찮았고, 무시무시하게 커다란 초대형트럭 사이를 지나 무사히 배에서 내리고 나니 너무 감사한 기분이다. 광민은 아톰의 벨트 소리가 심상치 않다며 걱정을 하지만 스위스에서 연기 나던 차를 경험한 덕분인지 마음이 많이 무겁지는 않다. 예정보다 두 시간이나 빨리 도착해서 배에서 이른 점심도 먹었고 오늘은 이 근처에서 정박한다고 했으니 마음이 한 껏 느긋해진다.
끼릴 문자로 된 간판 글씨며 아담한 정교회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정답게 느껴진다.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 러시아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리스가 끼릴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배를 타고나서야 알게 되었다. ) 그리고 보니 그리스 정교회의 본고장에 온 것이다. 그리스와 러시아가 이렇게나 문화적으로 맞닿아 있는 줄 꿈에도 몰랐다.
이제 한적한 동네 슈퍼마켓에서 새로운 그리스 재료들을 탐색할 시간이다. 동네 슈퍼마켓인데도 뭔가 풍성하고 색다른 재료들이 눈길을 끈다. 그동안 서양 요리의 본고장을 프랑스나 이탈리아라고 생각해서 전혀 기대를 안 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기본 재료를 많이 사놓을까 잠깐 고민도 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행지의 재료를 사용하자는 원칙을 정했다. 그것은 참 좋은 전략이었다.( 그리스는 우리가 가장 외식을 많이 했던 나라다.)
새로운 재료들이 궁금해서 구글을 통해 알아보려 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잘 안된다. 광민과 같이 알아보고 싶은데 뭔가 다른 생각으로 영혼 없는 대답만 한다.
광민이 혼자 운전을 하니 내가 혼자 요리를 담당하는 것엔 불만이 없다. 그러나 유물이나 유적지 못지않게 새로운 재료를 함께 탐색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고, 여행의 중요한 묘미다. 슈퍼는 박물관이나 유적지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게다가 난 결정장애가 있어서 광민이 알맞은 기준을 제시해주면 결정에 많은 도움이 된다.) 조금씩 속이 상하고 있는데 나를 재촉하는 ‘빨리’라는 말이 결국 귀에 거슬렸다.(여행 직전까지 매 순간 시간에 쫓기듯 살았던 탓인지 '빨리'라는 단어는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단어가 되었다.)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자 우리가 오늘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유적지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계획을 변경하기로 했다고 한다. 나와 의논도 없이 그런 결정을 하다니 너무 기가 막혔다. 결국 광민이 자신의 명백한 잘못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했지만 도착하자마자 부부싸움이라니ㅠㅠ 속상한 마음을 다 풀진 못했다.
그러나 우리에겐 공통의 문제가 있으니 일단 자동차 수리점을 찾았다. 영어가 안 통하는 사람들에게 각종 의성어를 동원해 설명을 하다 보니 어느새 우린 다시 한마음이 돼야 했다.
우리 차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설명을 들은 주인이 직원에게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라는 얘길 하는 것 같다. 그냥 길만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직원이 직접 오토바이로 우릴 안내해 준다. 소개받은 곳에 도착하자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분이 나와 우리 차를 조심스레 찬찬히 살피신다. 그나마 몇 마디 영어가 되는 그 직원이 가지 않고 우리를 위해 통역을 해준다. 그런데 이 분들은 우리 차가 괜찮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겨울이라 추워서 생기는 문제일 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없는 문제도 만들어서 이득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이런 분들을 만나다니! 마음이 훈훈해진다. 직원은 우리 차가 안전하게 도로에 진입할 때까지 가지 않고 살펴준다. 그리고 같이 손을 흔든다. 남편 때문에 생겼던 내 마음속 앙금이 스르르 녹아버린다. 첫날부터 그리스에 푹 빠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