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싶은 기억을 쓰는 일.
경주ist 작가의 첫 번째 연재 / 아주 보통의 ____.
주제는 도서 <2025 트렌드코리아>의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에서 떠올렸다. 나에게 아주 보통의 하루는 간절히 원하는 하루이기도 하고, 반면에 벗어나고 싶은 하루이기도 하다. 왜 그렇게 느끼는지 정리할 필요가 생겨 '아주 보통의 무엇'을 주제 삼아 연재를 시작한다. 아주 보통의 무엇을 들여다보자.
연재에 앞서 '아주 보통의' 개념을 명확하게 하자. '아주'는 보통 정도보다 훨씬 더 넘어선 상태를 의미한다. '아주'의 뜻에서부터 벌써 보통이 아니다. '아주'의 두 번째 의미는 어떤 행동이나 작용 또는 상태가 이미 완전히 이루어져 달리 변경하거나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두 번째 의미가 적합하겠다. 부사의 '보통'의 뜻은 일반적으로. 또는 흔하게 이다. '아주 보통의'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일반적인 것으로 정의한다.
아주 잊어버리고 싶었던 기억들이 새삼스럽게 다가올 때는 참 힘들어지네요.
은주 씨는 그런 기억들이 있나요?
-영화 시월애 中 성현-
영화 <시월애>는 1998년의 성현과 2000년의 은주가 우체통을 매개체로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하는 이야기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각자의 세상에서 편지로 소통하며 사랑하게 된다. 그들의 사랑이 시작된 시점은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을 나누기 시작하면서가 아닐까. 두 사람은 각자 벗어나고 싶은 아픈 기억을 나누며 서로를 통해 아픈 기억을 잊으려 한다. 아픈 기억을 잊기 위해서는 새삼스럽게 떠올려야 한다. 지나간 기억이 새삼스러울 때, 그 기억은 조금 더 짙고 선명하다.
‘새삼스럽게 떠올라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나요?’
에세이 워크숍에서 나눈 이 질문은 나 자신에게도 무겁게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에게 지나간 일을 떠올리게 할까 봐 곧바로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타인에 대한 배려라기보단 나 역시 잊고 지냈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잊고 싶은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까? 영화처럼 가까운 사람에게 아픔을 털어놓기? 혹은 그 기억을 글쓰기로 털어놓으면 객관적으로 정리되고 후련해질까? 어떠한 방법이든 잊기 위해서는 다시 떠올려야 했다.
22년도 오월, 아주 잊어버리고 싶은 일을 겪었다. 출근을 제외한 모든 일상을 놓아버렸다.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서 부모님께 이야기하며 기대었다. 부모님도 버거웠을까. 쿵. 우리는 그날 처음으로 함께 넘어졌다. 해결되기는커녕 부모님에게도 상처가 남았다. 기댈 곳을 잃어버리고 더욱 기운을 잃어갔다. 우리는 약속하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 그 일에 대해 두 번 다시 말하지 않았다. 지난 기억이 건드려지려 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를 피했다. 일상에서도 잊고 있던 기억이 선명해질까 마음을 졸였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줄어가는 것에 대해 조바심 나기도 했지만, 혹여나, 어쩌다, 새삼스럽게 그 기억이 떠오를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바쁘다는 핑계로 만남의 빈도를 줄였다.
그날에 대해 글을 써보면 힘든 마음과 함께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까 싶었다. 용기 내어 적어 보자면 ‘아주 잊고 싶은 기억’은 넉 달 전 에세이 워크숍을 신청하며 쓰려했던 첫 번째 에피소드다. 머릿속에 가득 찬 잊고 싶은 그 기억 때문에 종종 심란한 얼굴이 되었다. 글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상황 설명을 해야 했다. 덮어두고 담아뒀던 그날의 일을 꺼내야만 했다. 늘 회피해 온 나에게는 직면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네 번의 사랑 이야기와 네 번의 ‘ㅅ’ 이야기를 쓰면서도 끝내 서술하지 못했다. 매번 ‘다음 에세이로 적자.’ ‘다음엔 솔직해 지자.’ 다짐만 했다. 누군가 나에게 소설을 써보라 한다면 모를까. 에세이로는 한 줄도 쓸 수가 없다. 아. 이 문장을 쓰고 나니 이제 소설도 안 되겠다.
여전히 그날의 기억을 잊어버리지 못한 채로, 아니 잘 펼쳐보지 못한 채로 마지막 문단을 써야 한다. 잊지 못하고 다시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되돌아보면 22년도 오월만큼이나 마음을 답답하게 하던 일도 더러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상대적으로 작아진 아픔이라 기억이 희미해졌을 뿐이다. 아주 잊어버리고 싶은 첫 번째 기억은 더 잊고 싶은 두 번째 기억으로 잊을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더 나쁜 일이 생겨 이전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은 아무것도 잃어본 적 없는 사람보다 아름답습니다...
-영화 시월애 中 성현-
성현의 말대로라면 나는 아름답다. 왜 보다 아름다운지 고심하며 여러 이유들을 찾았다. ‘잊고 싶은 기억’이 생긴 뒤, 관계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시간을 되돌려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니 과거의 일을 후회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존중한다. 그래, 지금의 내가 아름다울 수 있겠다. 아픈 기억 하나쯤은 가져도 괜찮다. 지난날의 아픔을 위로받지 못했다면 어떠한가. 힘들었던 마음과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면 어떠한가. 괜찮지 않은 순간들은 새삼스럽게 또 오겠지만 스쳐갈 것임을 믿는다.
여전히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은 모르겠지만. 찾다 보면, 잊으려 애쓰다 보면, 부단히 에세이를 쓰다 보면 알게 될 것만 같다. 아주 보통의 글을 그냥 써보자. 계속 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