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학원에 간다. 앞으로 5개월 동안 평일에 학원에 다니며 편집 디자인을 배우기로 했다. 책 디자인뿐 아니라 광고, 상품 패키지, 브랜드 디자인 등도 같이 배운다.
최근 도서 편집 일이 아닌 다른 일을 시작해 보고 싶어서, 출판사가 아닌 다른 업계에서 일자리를 찾아보았다. 8년 가까운 시간 동안 도서 편집 일만 해 온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뭐가 있을까. 교정 교열 짬밥이 있으니 자막을 감수하는 일은 어떨까. 그런데 자막 감수는 타자가 빨라야 한단다. 속기사 자격증을 요구하는 곳이 많았다. 25년 가까운 시간 동안 독수리 타법을 고수해 온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또 해외 콘텐츠의 언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자막을 감수하려면 외국어 실력도 출중해야 하는데, 나의 외국어 실력은 ‘외국어 전공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너무도 미천하다. 무엇보다 나는 교정 교열 일에 그다지 재능이 없는 것 같다. 도서 편집자 일을 그만두려고 하는 데는 이러한 이유도 있기 때문에, 자막 감수는 나한테 잘 맞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과거 온라인 몰 MD로 잠깐 일했던 경험이 있으니까 온라인 몰 MD 일을 해 보는 건 어떨까. 사실 올해 초 나는 스마트스토어를 운영한 적도 (잠깐이지만) 있다. 상품 페이지와 배너도 곧잘……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그럴 듯하게 만들었다(포토샵이나 일러스트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더 쉽게 만들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도서 편집자로 일하면서 온라인상의 상세 페이지 이미지와 카드 뉴스 등의 홍보물을 기획한 경험이 많기도 하니, 온라인 몰 MD나 콘텐츠 마케터 일도 해 볼 만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온라인 몰 MD와 콘텐츠 마케터 분야로 지원서를 냈다. 그리고 내는 족족 서류 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떨어졌다. 신입으로 받기에는 부담스러운 30대 중반의 나이도 문제였겠지만, 디자인 툴을 다룰 줄 아는 능력이 거의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았다. 포토샵을 한 번도 안 다뤄 본 것도 아니고,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독학으로 배웠을 때도 곧잘 사용했기 때문에 입사해서 디자인 툴 사용법을 배우기 시작해도 업무에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이고, 돈 주고 사람을 쓰는 고용주 입장에서 뭘 믿고 나를 뽑겠는가.
그래서 학원에 다니기로 한 것이다. 생각해 보니 도서 편집자로 일할 때도 나는 책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 글과 그림을 어떻게 배치해야 책이 재미있어 보일까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고, 그 시간을 즐겼다. 도전해 보고 싶었지만, 디자이너 입장에서 손이 너무 많이 가는 작업인지라 아직 도전해 보지 못한 구성 방식이 있기도 하다(디자이너의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은 당연히 작업 단가가 높아진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면서 여러 책을 마감해야 하는 내부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도 이런 작업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면 내가 직접 디자인해 보면 어떨까? 북 디자이너로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내가 아는 북 디자이너 중에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북 디자인을 시작해, 연세가 지긋한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분이 있다(실력 좋은 디자이너로 소문나 있어서 섭외가 힘든 분이다). 또 나는 그림도 그릴 줄 안다. 내 그림을 활용해서 북 디자인을 해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실제로 일러스트까지 맡아서 하는 북 디자이너도 있다. 북 일러스트레이터로도 일해 보고 싶은 만큼, 북 디자인을 배워 두면 일할 때 도움이 많이 될 거다. 또 지금 당장은 도서 편집자로 일하고 싶은 생각이 크게 없지만, 언젠가 다시 편집자로 일하게 된다면 그때도 북 디자인을 배워 둔 게 도움이 될 거다. 상대가 어떻게 일하는지 알고서 일에 대해 소통하는 것과 잘 모른 채로 소통하는 것은 크게 다를 테니까. 내가 편집 디자인 과목을 선택한 데는 바로 이러한 이유들이 있었다.
하지만 수강 결정을 하기까기 고민이 많았다(수강 신청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내리 이틀을 아무것도 못 하고, 잠까지 설치며 고민했다). 7월까지는 오후에만 나가지만, 8월부터는 아침 아홉 시 반부터 저녁 여섯 시 반까지 여덟 시간을 배운다. 오후에만 나간다고 해서 수업 시간이 짧은 건 아니다. 무려 다섯 시간이나 된다. 달수로 따지면 총 5개월, 일수로 따지면 99일, 시간으로 따지면 720시간이나 되는 대장정이다. 5개월 동안 어딘가에 묶여서 지낸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학원에 다니는 동안에는 직장을 구할 수 없을 텐데. 이제 내가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닌데, 직장 생활을 하려면 최대한 빨리 직장을 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직장 구하는 일을 5개월이나 유예해도 괜찮을까? 디자인을 배우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예술적 감각도 살짝 있기는 하지만, 컴퓨터는 잘 다루지 못하는 내가 과연 5개월 동안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있을까? 배우다가 너무 어려우면 어쩌지? 과목이 나한테 안 맞으면 어쩌지? 배우다가 갑자기 어디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들면 어쩌지?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나는 아직 직장 생활을 할 마음이 없다. ‘자신이 없다’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앞서 내가 여러 회사에 지원했던 것은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니 세상에서 고립되는 느낌,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는 성격도 아닌데 말이다. 직장에 다니며 최소한의 인간관계라도 맺으면서 지내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직장에서의 인간관계가 두렵다. 바로 전 직장을 퇴사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인간관계의 어려움이었다.
앞으로도 한동안 직장에 다닐 생각은 크게 없을 것 같으니, 직장 구하는 일 때문에 디자인 배우는 일을 미룰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학원에 다니다가 갑자기 다니고 싶은 직장을 발견하게 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있지만, 앞선 경험들로 봤을 때 디자인 실무 능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뚜렷한 기록이 없는 한 취직은 힘들 것 같다. 또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나 많은데, 그중 5개월이 뭐 그렇게 긴 시간이라고. 나의 발전에, 새로운 도전에 투자하는 건데 아까울 게 뭐가 있겠는가. 게다가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100퍼센트 나랏돈으로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물론 이 나랏돈에는 그동안 내가 낸 세금이 포함돼 있겠지만. 수업료를 내가 부담해야 했다면 애초에 고민도, 학원에 다닐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취업하라고, 취업이든 창업이든 뭐라도 좋으니 제발 나가서 돈 좀 벌라고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제도가 있어서, 이 제도를 활용해 배우기로 한 것이다). 언제 또 이런 수업이 열릴지 모르고, 국가 예산 부족으로 지원 제도가 언제 폐지될지도 모른다(세수 부족 상황인 만큼 충분히 가능성 있다). 기회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다. 백수로 지내고 있는 지금이 기회를 잡을 타이밍이다. 수업이 어려울 수도 있다. 내가 따라가지 못할 수 있고, 내 적성에 안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수업을 들어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학원에 다니는 동안 놀러 가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돈도 안 버는 백수가 무슨 돈이 있다고. 강제 절약 기간으로 생각하자. 학원에 다니면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사람도 만날 수 있다. 교류까지는 못 하겠지만, 적어도 사람들 사이에서 지낼 수 있다. 혼자는 아니게 된다.
수업 상담을 갔을 때 수강을 망설이는 나를 움직이게 한 결정적인 말이 있었다.
“커리큘럼 보면 아시겠지만, 편집 디자인만 배우는 게 아니에요. 배우면서 어느 쪽이 나랑 잘 맞는지 찾고, 진로를 결정하면 돼요. 진로를 찾아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래, 앞으로의 5개월을 나에게 어떤 분야의 디자인이, 어떤 일이 잘 맞는지 찾아 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어쩌면 디자인 일이 나랑 잘 안 맞을 수도 있다. 그걸 아는 것도 성과이지 않을까. 그래야 미련을 버리고 다른 일을 찾아보지. 과거 방송 PD를 꿈꾸고 도전했을 때처럼 말이다(나는 대학교 4학년 때 갑자기 부전공을 경영학에서 방송 영상학으로 바꿀 만큼 방송 PD가 너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외주 제작사에서 조연출로 일하면서 방송 PD 일이 나에게 맞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만약 조연출 일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방송 PD 일에 미련을 못 버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도전하지 못한 일을 아쉬워하면서). 포기해야 할 게 무언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나저나 학원 상담사가 원생 유치하는 기술이 아주 좋은 것 같다.)
전에 같이 일했던 도서 편집자 선배가 해 준 말이 있다.
“편집자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뭐 교정 교열만 했나요? 글만 만졌나요? 종합 예술을 했잖아요. 어디 그뿐이에요? 기획, 계약, 마케팅 협력, 일반 사무 등등 온갖 것을 다 했잖아요. 편집자로 일했던 경험이면 출판사 밖에서도 못 할 게 없어요.”
나에게 이 말을 해 준, 나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도서 편집자로 일했던 선배는 30대 후반의 나이로 출판업계를 떠나 다른 업계에서 성공적으로 취업했고, 자신이 찾은 새로운 일에 만족스러워했다(여전히 그럴 거라 확신한다. 지금은 연락이 끊기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니 선배의 말이 맞는 말 같다. 편집자로 온갖 것을 다 했던 우리가, 내가 못 할 게 없지. 나는 그저 내가 해 봤던 수많은 일들 중 내가 더 잘하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고르면 된다. 앞으로의 시간은 나에게 바로 그런 일을 찾고 고르는 시간이 될 것이다. (24. 6.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