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한 언니 J와 연락할 일이 있었다. 새해 인사 차 연락한 게 마지막이었으니까 거의 반년 만의 연락이었다(J는 먼 도시에서 살고 있어서 얼굴을 자주 볼 수 없다).
J가 물었다.
- 어찌 살고 있어?
“밥 먹었어?”만큼이나 상투적이고 의례적인 인사말이지만, 나에게는 이 말이 질문으로 느껴졌고 조금 불편했다. 손톱에 난 거스러미 또는 나무 상판에 일어난 얇고 날카로운 가시 같았달까. 꼭 “취직은 했어? 아직도 쉬고 있어?”라고 묻는 거 같았다. 1년 가까이 백수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내가 뭘 하면서 지내고 있는지가 왜 알고 싶은데?’
내 마음 안에서 뾰족한 가시가 돋아났다. 사람마다 자기 상황을 말하고 싶지 않은 때도 있을 텐데, 왜 알려고 하는 거지? 어찌 살고 있냐는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당황스럽고 무례하고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을 거란 걸 왜 모르는 거지? 왜 이렇게 무신경한 거야?
상투적인 인사에 나 또한 상투적으로 “잘 지내요.”라고 대답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J가 상투적인 인사를 넘어 정말 내 상황이 궁금해서 물었던 것일지라도, 아직도 마음이 힘든 건지 걱정이 되어 한 말일 게 분명했다(J는 앞서 내가 겪은 마음의 문제를 알고 있다). 10년 넘게 알고 지낸 J는 분명 그런 사람이니까. 또 생각해 보면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됐을 일이다. 그래도 J는 이해했을 거다. ‘얘가 지금은 말할 수 있는 마음 상태가 아니구나.’ 하면서.
나는 왜 이렇게 배배 꼬였을까?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상대의 마음을 의심이나 하고. 내 마음 안에 나를 사랑할 여유가 없을 때, 온통 나를 미워하고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으로만 가득 찼을 때 더 그러는 것 같다. 사람이 더 뾰족해지고 더 못나지는 거 같다.
J의 문자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이뤄 놓은 거 하나 없이 쉬고 있는 상황,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상황,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함과 세상에서 점점 고립돼 가는 거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상황을 J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처음 보는 상담사, 온라인상에서 만나 함께 감정 드로잉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잘만 말하더니, 정작 가족이나 다름없는 J에게는 나의 약한 면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세울 거 하나 없이 부끄럽고 나약한 면만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을 고백했다가는 동정받거나 비웃음을 살지 모른다. 홀씨처럼 잠깐 머물렀다 가는 사람들한테 그런 취급을 받는 건 참을 만하다. 무시할 수 있다. 거짓 위로를 한다 하더라도 속아 넘어갈 만하다. 하지만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사람에게 동정이나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건 참을 수 없다. 지금의 나는, 스스로가 너무 마음에 안 들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움을 느끼는 나는 작은 동정과 비웃음에도 그대로 주저앉을 수 있다. 나를 지켜야 한다. 나를 지키려면 J에게 나의 진짜 모습을 내보여서는 안 된다. J가 지금의 내 방황을 알더라도 절대 나를 동정하거나 비웃지 않을 거란 걸 잘 알면서도, 마음 한쪽에서 그런 마음이 일었다. 내가 어떻게 해도 막을 수 없는 마음이.
어떻게 살고 있냐는 문자를 읽으며, 정말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요즘의 일상을 가만 되짚어 보았다. 투고한 원고가 모두 반려된 뒤 쓰기를 멈추었던 동화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글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쓰다 멈추고, 이어서 쓰기를 미루다 보니 결국 원고들은 ‘미완결 동화’ 폴더로 들어가 버렸다. 한 달 전부터는 리추얼 프로그램을 통해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고, 낙서 같은 그림이나마 간간이 그리고 있다. 또 감정 드로잉 프로그램을 통해 매일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도 하고 있다. 지난 달 말에는 동해로 여행을 다녀왔고, 이달 초에는 강원도 홍천으로 비건과 환경을 주제로 한 캠핑도 다녀왔다. 날이 더워져 산책이 어려워지면서 집에서 요가도 시작했다(내킬 때만 하고, 내키는 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문제이기는 하지만). 나라에서 미취업자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참여 신청을 하고, 심리 상담 일정도 잡고, 직업 훈련 과정도 알아봤다(그래서 지금은 편집 디자인 학원에 다니고 있다). 내 취미를 발전시키고 내 작업물을 모아 놓고 싶어서 SNS에 드로잉 계정, 사진 계정, 요리 계정을 따로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고,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해서 지금의 이 글 같은 수필도 모아 놓고 있다. 다음 달부터는 주말마다 모임에 나가, 완벽주의를 잘 다루는 법도 배운다(그렇다. 나는 지독한 완벽주의자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한참을 고민한 끝에 J에게 요즘 하고 있는 일들을 털어놓았다. 곧 J에게 답장이 왔다.
- 너 자신을 챙기며 잘 살고 있구나.
마음속에 들어차 있던 커다란 돌덩이 같은 게 쑥 빠지는 느낌이었다. 돋아났던 가시가 스르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나, 나를 챙기면서 잘 살고 있었구나.
그제야 깊은 물속에서 빠져 죽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수면 위로 올라오려고, 숨을 들이마시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내가 보였다. 그동안 내가 보내 온 시간이 그저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무던히 노력하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나를 살리려고.
나는 J에게 답장했다.
- 나한테는 나밖에 없는데, 내가 잘 챙겨야지요.
‘잘 지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꼭 직장에 다녀야 잘 지내는 것일까? 나는 직장에 다니면서 안 좋은 생각을 많이 했다.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웠고, 달리는 차가 나를 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 높은 층에 있는 우리 집 베란다에서 몸을 내밀고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볼 때도 있었고, 무의식 중에 그런 행동을 한 내가 너무 무섭고 가여워서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기도 했다. 그날 나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해서든 회사를 나오자. 지금은 나를 살려야 할 때다. 그렇게 생각했고, 나는 여전히 다시 회사에 다닐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좋은 곳(다시 말해 돈 많이 주는 곳, 큰 회사)’에 취직하는 것만이 성공하는 거라고 보고 배우며 자란 탓인지, 그 가르침의 잔재로 ‘정상적인 삶 =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이라는 공식이 내 머릿속에 박혀 있나 보다. 그래서 회사에 다니지 않는 나의 삶은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 있고, 부모님에게서 경제적으로 독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의 삶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드나 보다.
나는 사회에서, 미디어를 통해서 회사에 소속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그러한 방식으로도 굶지 않고 잘 살 수 있다는 것도 여러 번 확인했다. 물론 그들은 백수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도 처음에는 길든 짧든 백수 시절이 있었다(백수 시절 없이 바로 밥벌이를 한 사람도 간혹 있겠지만). 백수로 지내는 동안 그들은 언젠가 혼자의 힘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부단히 내공을 쌓았을 것이다.
내가 다시 회사에 다니게 될지, 독립적으로 일하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언젠가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히 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다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시간이, 다시 일할 용기가 나도록 나를 보살피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한 내공을 쌓는 일을 어쩌면 지금 나는 능히 잘 해내고 있는 게 아닐까? 나한테 하나밖에 없는 나를 잘 챙기고 있는 게 아닐까?
*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치레로 자주 묻는다.
- 잘 지내시죠?
나는 이 인사를 할 때마다 생각한다.
‘당신이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어요.’
이런 바람을 담아 건네는 인사인데, 누군가에게는 이 말이 불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잘 지내고 있지 않은 나의 상황을 털어놓을 여지를 애초에 차단해 버리는 말.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가정이 실린 인사가 누군가에게는 잔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무슨 대답이라도 할 수 있도록 열어 놓은 인사가 낫겠다.
“요즘 어떻게 지내요?” (24. 6.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