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이 되는 일

by 경이


치과에 다녀왔다. 4년 만에 가는 거였다. 나는 치과를 무서워한다. 그런 내가 이도 안 아픈데 제 발로 치과를 찾아가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앞니의 파인 부분을 떼울 겸 충치 검사도 하기로 했다. 간호사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진료실 의자에 누웠는데, 잠깐. 이 기분 뭐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극강의 편안함이다. 나의 구부정한 목과 허리를 이렇게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받쳐 주다니. 간호사 선생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이 의자 어디서 살 수 있나요, 네?” 우리 집 매트리스를 당장 치우고 진료실 의자를 갖다 놓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다. 마지막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잡은 덕분에 다행히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치료가 시작되고, 의사 선생님이 딱딱하고 뾰족한 무언가로 내 이를 긁기 시작했다. 끽끽끽 끽끽끽 끽끽. 귀가 시린 건지, 진짜 이가 시린 건지 아픈 건지, 정체 모를 것이 느껴졌다. 주먹을 꽉 쥐었다. 눈은 감지 않았다. 나를 비추는 스탠드의 기둥에 박힌 나사를 뚫어지게 보았다. 나에게 고통을 주는 현장을 직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바로 마주하고 싶었다. 피하지 않겠어. 그래야 덜 무서울 거 같으니까.

충치는 없다고 했다. 곧 스케일링이 시작됐다. 드릴이 아닐까 싶은 무언가가 굉음을 내며 내 잇몸 구석구석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저, 제 잇몸이 이러고도 무사할까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치위생사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리면 더 큰 고통이 엄습할 거 같았다. 그런데 어어, 왜 이러지? 자꾸 눈이 감긴다. 졸음이 쏟아진다.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아! 하세요.” 치위생사 선생님이 말했다. 그 뒤로도 나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더 들어야 했다.

치과에 가서 “안 아프게 해 주세요!”라는 말을, 애원을 안 하기는 처음이다. 치과에서 안락함을 느낀 것도, 잠이 온 것도 처음이다. 4년 만에 치과에 방문했는데 충치 먹은 이가 하나도 없다니, 럴수럴수 이럴 수가.

치과를 나서는데 어깨가 한껏 올라가 있는 게 느껴졌다. ‘의기양양함’이란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참 으른’의 필요조건 중 하나는 치과에서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는 패기(돈 때문에 무서운 거 빼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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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술과 농담⟫을 읽고 있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술에 잔뜩 취해 뻗었던 작가의 일화를 읽으며 나의 새내기 시절을 떠올렸다. 나 또한 그랬다. 더 고백하자면, 나는 직장에서도 몇 번 같은 실수를 했다.

실수한 다음 날이면 눈을 뜨자마자 중얼거렸다. “아, 망했다.” 그런 뒤 반사적으로 화장실로 직행했다. 전날 게울 대로 게워서 위 속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게 분명한데도 뭘 더 게우고 싶은지 헛구역질을 해 댔다. 전날 내가 벌인 창피한 짓들이 얄궂게도 생생히 떠올랐고, 나는 그 기억들을 토해 내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자퇴나 퇴사를 할 수는 없으니, 다시 학교와 회사에 가서 나의 창피한 짓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관한 사람들을 마주해야 했다. 없던 일로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도 없던 일이 될 수 없는 일을 떠올리며 선배와 친구들, 상사와 동료들에게 어색하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시겠냐, 그 험한 꼴을, 못 볼 꼴을 보았는데. 이제 내 학교생활은, 내 회사 생활은 아주 완전히 폭삭 망했다, 끄아아아아아아!

하지만 그날의 실수는 예상치 못한 전개로 이어졌다. 선배와 친구들, 상사와 동료들은 이상하게도, 참으로 고맙게도 나의 실수를 재미있게 봐 줬다. 존재하지 않았던 나의 존재감이 만들어졌고, 그들의 뇌리에 나의 존재감이 새겨졌다. 그러면 안 되는데, 정말로 그러면 안 되는데, 그때의 나는 예상치 못한 전개를 은근히 즐겼던 것도 같다.

세 번째 직장에서 한 번 실수한 뒤로는(두 번째 직장에서는 실수하지 않았다. 첫 번째 직장에서도 한 번이었다, 딱 한 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추태 부리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래야 했다.

다행히 나는 추태 부리는 인간은 되지 않은 채 몇 년을 잘 버텨 왔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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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농담⟫이 속한 ⟨말들의 흐름⟩ 시리즈를 좋아한다. 사실 이 시리즈의 책은 아직 한 권밖에 안 읽었다. 더 정확히는 그 한 권인 ⟪술과 농담⟫도 아직 읽고 있는 중이다. 같은 시리즈의 책을 한 권 더 사 놓았고, ⟪술과 농담⟫을 다 읽으면 곧바로 이어서 읽을 예정이다.

⟨말들의 흐름⟩은 끝말잇기 형식의 시리즈이다. ⟪술과 농담⟫ 뒤에는 ⟪농담과 그림자⟫가, 그 뒤로는 ⟪그림자와 새벽⟫이 이어지는 식이다. 흥미롭고 재치 있는 발상이다. 시리즈의 일관된 표지 디자인도 마음에 든다. 얼핏 보면 패턴처럼 보이는 이미지는 자세히 보면 글자이다. 책의 두 중심 키워드를 영어로 쓴 것이다. 문자 사이사이를 메운 파스텔 계열의 색 조합도 조화롭고, 금박을 새침하게 입힌 제목과 저자 이름도 어쩌면 이토록 세련됐을까. 매력의 화룡점정은 종이다. 이렇게나 하얗고 밝은 색감의 표지에, 무려 모조 계열의 종이임에도 코팅을 안 하다니, 하. 이 책의 패기를, 이 책을 만든 이들의 패기를 나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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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리즈의 책을 사실 한 권이 아니라 두 권을 더 사 놓았다. 지금은 내 손에 없는 다른 한 권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 권으로, ‘음악’이라는 키워드로 끝난다. ‘음악’이라는 글자에 그 사람이 생각났다. 표지 오염을 막기 위한 비닐 포장을 나는 차마 뜯을 수 없었다. 그 사람에게 그 책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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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책상에, 너의 집 한 구석에, 너의 손에, 너의 기억 어딘가에 나의 흔적이 옅게나마 남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선물한다. 내 고백에 아무 답도 하지 않은 너에 대한 복수라면 복수이고, 너에 대한 미련이라면 미련이고 욕심이라면 욕심이지.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그냥 나의 작은 한 조각을 너에게 남기고 싶어서. 이 책을 볼 때마다 잠깐이라도, 아주 찰나의 순간에라도 나를 떠올려 줬으면 해서.

너에게 줄 편지를 쓰고, 책을 포장하면서 생각했어. 네가 좋아할까? 네가 재미있게 읽을까? 내가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곱고 예쁘다’는 감정을 너도 똑같이 느낄까?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내가 좋아하는 책을 네가 예쁘다고 연신 말한 날 나는 기뻤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너도 좋아하고,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너도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이, 너와 나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거든.

너에게 남은 나의 흔적이 곱고 보드라운 것이면 좋겠어. 너를 잠시나마 웃게 하는 어떤 것이기를, 부디 무용하고 무가치한 것은 아니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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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심해 보여요. 여전히 그 사람한테 미련을 못 버리고, 아직 기회가 남아 있는 건 아닌지 기대하는 제가 답답하고 이해가 안 돼요. 그런데요,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 사람을 그렇게나 많이 좋아했는데 어떻게 쉽게, 단번에 마음을 접을 수 있을까. 기대나 미련이 드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요.”

주치의 선생님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 마음 한두 달은 갈 거라고 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며,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오히려 ‘회피’라고 했다. 나는 지금 나의 마음과 감정에 솔직한 거라고 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좋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거 같다고 했다. 전보다 빨리 부정적인 감정에서 빠져나고 있는 거 같다고, 확실히 그런 거 같다고 말했다. (24.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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