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른여섯

by 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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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동물의 왕국⟩을 즐겨 보고 있다. 겨울잠을 마치고 굴 밖으로 삐죽 얼굴을 내민 새끼 북극곰을 보았다. 눈송이처럼 하얗고 보송보송한 털 뭉치 위 앙증맞은 까만 콩 세 개. 굴속으로 얼굴을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는 새끼 북극곰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하다. 굴 밖은 어떤 세상일까. 뭐가 있을까. 엄마와 내 형제 말고도 다른 생명이 살고 있을까. 두 앞발로 눈 벽을 짚고 천천히 몸을 빼낸다. 목을 길게 빼, 처음 마주하는 바깥세상을 탐구한다.

귀엽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럽다. 귀여움으로 똘똘 뭉친 새끼 북극곰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발을 동동 구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새끼 북극곰은 알고 있을까? 자신이 얼마나 귀여운 생명체인지. 귀여운 짓을 안 해도 귀여움이 흘러 넘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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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북극곰이 겨울잠을 자는 것은 아니다. 임신한 암컷만 겨울잠을 잔다. 어미 곰은 6개월 동안 굴속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꼼짝 않은 채 지내며 새끼를 낳고 새끼에게 젖을 먹인다. 3월에서 4월 사이 어미 곰과 새끼는 겨울잠을 마치고 굴 밖으로 나온다.

누가 어미 곰에게 가르쳐 준 걸까. 새끼를 가졌을 때는 굴을 파고 들어가 겨울잠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새끼를 낳고 기르고 지켜야 하는지를. 단순히 어릴 적 어미가 했던 행동을 기억하고 따라 하는 것일까. 어미가 곰의 언어로 누누이 말해 준 걸까. 아니면 작고 연약한,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생명을 품은 어미라면 본능적으로 행하는 행동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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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넘긴 이후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 때마다 엄마를 생각한다. 내 나이 때 엄마는 어땠지? 뭘 하고 있었지?

서른여섯의 엄마는 열한 살 아들과 여덟 살 딸을 둔 여자였다. 빼빼한 몸으로 농사일과 집안일, 육아까지 모두 해내며 하루하루를 아등바등 살아 내고 있었다. 나는 엄마를 존경하지 않지만, 엄마가 강인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엄마는 본디 강인했을까, 두 아이의 엄마라는 막중한 역할과 책임을 지게 되면서 강하고 독한 사람이 된 걸까. 나는 엄마의 엄마가 되기 전 시절을 잘 모르지만, 후자 쪽이라고 확신한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라는 존재처럼 강인한 사람이 어떻게 세상에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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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이 해 준 내 안의 힘을 믿으라는 말을 종종 떠올린다. 아니, 매일같이 이 말이 적힌 팀장님의 쪽지를 읽는다. 이 말을 해 줄 때 팀장님은 몇 살이었을까. 팀장님은 언제부터 성숙한 어른이었을까. 나도 당시의 팀장님 나이가 되면 진정으로 내 안의 힘을 믿을 수 있을까. 나도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어린 누군가에게 자신 안의 힘을 믿으라고 말하는, 용기를 주는 참어른이 될 수 있을까.

어른이 된다는 게 나이의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여전히 나이 탓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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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호의가 받는 사람에게 늘 호의로만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다. 때로는 불쾌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은 채 베푼 호의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에게 또 자신만 즐거운 호의를 베풀었고, 나는 나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엄마의 태도에 또 폭발해 버렸다. 또 전혀 컨트롤이 안 될 만큼 이성을 잃고 말았다.

이렇게 발작 버튼이 눌린 날에는 감정이, 정신이, 온몸이 너덜너덜해진다. 분노와 죄책감, 내가 부적절한 인간이라는 생각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피폐해진다. 망가진다. 정말 무슨 일을 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공포에 휩싸인다. 내가 무서워진다.

엄마는 알고 있을까. 본인의 이기적인 호의가 나에게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주는지. 아무리 설명해도 엄마는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일부러 고집 부리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엄마의 세계에서 호의가 호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엄마의 이해 가능 범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더 이상 엄마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헛수고를 들이지 않기로 했다.

또 불같이 화내고, 또 날카로운 말을 마구 쏟아 냈다. 제발 엄마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기를 바랐다. 엄마의 실수가 제발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바랐다. 내가 나를 두려워하는 일이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엄마는 역시 미안하다는 무의미한 말만 반복했다. 나는 확신했다. 역시 부질없는 바람이란 걸.

나를 존중할 줄 모르는, 존중해야 할 필요를 전혀 못 느끼는 엄마는 언제고 나에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존중받지 못한 나는 언제고 또 너덜너덜해질 것이다. 내가 언제까지 망가져야 할까. 얼마나 망가져야 엄마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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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못 견디게 역겨운 날이 있다. 내 인내심의 한계를, 인성의 밑바닥을 본 때 특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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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 선생님에게 엄마와의 일을 일을 털어놓았다.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크게 화를 내느냐고 물었다.

“아니요.”

나랑 가장 가까운 관계, 가족이어서 유독 엄마에게 크게 화를 내는 거 같다고 덧붙였지만, 이 말은 틀렸다.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주의를 줬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연거푸 반복하는 사람은 내 곁에 두지 않는다. 아무리 가까운 지인이라고 해도 일정 거리를 둬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어쩌면 덧붙여 한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에게도 적절한 거리 유지가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는 하루 만에 화가 가라앉았어요. 전에는 며칠이 지나도 분을 못 삭혔거든요. 금방 가라앉을 거야, 이 감정도 언젠가 지나갈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안심시키려고 했어요.”

사실이다. 또한 나를 진정시키기에 앞서 나는 내 분노를 부정하지 않았다. 충분히 화날 수 있는 상황이며, 내가 느끼는 분노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인지시켰다. 그리고 전보다는 조금 덜 망가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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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부터 남들에 비해 느렸다. 시계 보는 법을 익히는 데도, 영어를 배우는 데도, 수학을 이해하는 데도 한참 걸렸다. 배우는 게 너무 더뎌서, 그런 내가 너무 답답해서 나는 내가 모자란 아이인 줄 알았다. 생리도 중2가 되어서야 시작하고, 고2 때까지 키가 자랐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내가 잘하는 게 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도 한참 걸렸고, 여전히 알아 가는 중이다.

그래도 끝내는 해냈다. 나의 속도로 배우고 성장하고 알아냈다. 나는 남들이 아니다. 나다. ‘느리다’는 건 상대적인 속도일 뿐 나의 속도를 적확하게 정의하는 표현이 아니다. 내가 나의 삶을 나의 속도로 살아가는 게 문제 될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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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섯이 되는 날을 며칠 앞두고 타로점을 보러 갔다. 점을 봐 주시는 분에게 그간의 짝사랑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물었다.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요?

“아니요, 매력 있어요. 귀여워요! 한번 말문 터지면 엄청 재미있어요. 말문이 터지기까지 친해지는 데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같이 간 언니도 점 봐 주시는 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괜히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 아니냐고 했더니, 아니란다. 진짜란다. 자신은 있는 그대로 얘기한다고, 엄청 솔직한 사람이란다.

그 사람이랑 잘되지 못한 게 여전히 많이 아쉽다. 난 도대체 걔를 얼마나 많이 좋아한 걸까. 깊게 아는 사이도 아니었으면서. 하지만 내가 경험한 그 사람은 정말 귀여웠다(가끔 열받게도 했지만). 같이 있으면 편하고, 말없이 있어도 하나도 안 심심하고 안 어색했다. 나는 걔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 인사를 건넬 때 만남의 여지를 좁쌀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남겼더라면 지금의 아쉬움이 조금은 덜했을까. 아니면 여전히 답답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상태로 지내고 있을까.

이 마음은 도대체 얼마나 오래 갈까. 한편으로는 지금의 이 아쉬움이, 아쉬워하는 내 모습이 사랑스럽다.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나 깊고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게 마음에 든다.

나처럼 귀엽고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놓치다니. 너 크게 실수한 거야,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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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는 나의 쓸모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쓸모없는 나는 매력 없고 가치도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존재하기 위해, 존재할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나의 쓸모를 애타게 찾아 헤맸다. 늘 조급했고, 불안했다.

심리 상담사 선생님이 말했다. 쓸모없는 사람이어도 괜찮다고. 사람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귀한 존재라고.

인간의 쓸모란 무엇일까. 꼭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어야 존재 가치가 있는 걸까. 사회에서의 쓸모가 그 사람이 지닌 가치와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나는 그동안 나를 제대로 존중하고 대접할 줄 몰랐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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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즐거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주일 중 기분 좋은 날이 더 많았던 거 같아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거 같이 느껴지고 우울한 날도 있었지만, 재미있고 내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된 날도 있었어요.”

“그렇죠. 사람이 항상 행복할 수만은 없죠.”

주치의 선생님의 말을 들으니 더 안심이 됐다. 완벽하지 않은 내 일상이, 내 모습이 꽤 괜찮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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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섯이 되었다. 서른여섯이 된 나는 나에게 조금 더 잘해 줄 예정이다. 나를 위한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더 많이 하고, 나에게 더 너그러워질 예정이다. 나의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기계적으로나마 열심히 공감해 줄 예정이다. 그래,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지, 암. 인간미 넘치는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힘껏 귀여워해 줄 예정이다.

서른여섯의 내가 경험할 미지의 것들 그리고 더 깊어져 있을 미지의 내 모습이 기대된다. 서른여섯 번째 다시 태어난 걸 진심으로 축하해. (25.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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