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뉴스레터를 구독해서 보고 있다. 비경제 활동 인구로 분류된 ‘그냥 쉬었음’ 청년이 늘고 있다는 기사가 요즘 자주 올라온다. 기사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그냥 쉬었음’ 청년의 통계 안에 나도 포함돼 있을까? 나는 ‘그냥’ 쉰 걸까. 쉴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내가 일을 쉰 이유가 쉴 만한 이유로 타당했던가? 타당하지 않으면 그냥 쉰 게 될까? 내가 내세우는 이유가 누구의 시점에서 타당해야 하는 거지? 타당한지 여부를 과연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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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모전에 도전했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글쓰기, 다른 하나는 캘리그라피 공모전이다. 글쓰기 공모전 작품은 금방 마무리해서 접수했다. 마침 전부터 쓰고 싶었던 글과 주제가 맞아떨어져 바로 써 내려갔다. 반면 캘리그라피는 작업하는 데 한참 걸렸다. 문구를 정하는 단계에서부터 애를 먹었다. 괜찮다고 생각한 문구가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가 걸리는 데가 있었다. 이런 뉘앙스로 과연 내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문구부터 마음에 들지 않으니, 마음에 드는 글씨 또한 나올 리 없었다. 며칠을 고민하고 수십 번 문구를 바꾼 끝에 그나마 가장 마음에 드는, 내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문구를 찾았다. 이제 됐다. 글씨 쓰는 건 식은 죽 먹기지. 쓰고 싶은 게 확실해졌으니, 글쓰기 공모전에 낸 작품처럼 금방 마무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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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은 죽 먹기는 무슨.
앞서 학원에서 편집 디자인을 배울 때, 나는 손글씨 타이포그래피로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원하는 서체를 찾는 게 한참 걸릴 거 같기도 하고(다시 말해 귀찮아서), 디자인 툴로 서체를 변형하는 것도 미숙해서, 차라리 글자를 직접 쓰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나는 손글씨를 컴퓨터로 옮겨 와, 그대로 선을 따서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했다. 레퍼런스는 굳이 찾지 않았다. 만들고 싶은 글자 상이 명확했으니까. 몇 번 쓰고 수정하고 쓰고 수정하니 금방 마음에 드는 형태의 글자가 완성됐다.
학원에서 했던 것처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쓰면 돼. 그런데 지금 나 어떤 형태의 글자를 쓰고 싶은 거지? 아무리 써도 마음에 드는,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는 형태의 글자가 나오질 않았다. 레퍼런스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디자이너들의 타이포그래피 작품을 한참 봤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글자의 의미와 분위기에 형태가 어쩌면 이렇게 딱 맞아 떨어지지? 어떻게 이렇게 세련되고 개성 넘치는 거지? 나는 저렇게 못 하는데. 계속 노력한다고 저런 수준의 디자인을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나 빼고 다 잘하는 거 같았다. 못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인 거 같았다. 스스로 디자인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거 같았다. 학원 선생님이, 미술을 전공하고 미술 선생님으로 오래 일한 심리 상담사 선생님도 분명 내가 감각과 재능이 있다고 했는데……. 다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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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 디자이너를 뽑는 몇 곳에 지원서를 냈다. 서류 통과가 안 될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모두 경력자를 원하고 있었고, 설령 신입을 뽑을 의사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엄청난 실력을 가진 고수가 아닌 이상, 천재적 재능이 포트폴리오에서 보이지 않는 이상 비전공자에, 나이까지 많은 나에게 그들이 관심을 보일 이유는 조금도 없을 거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원서를 낸 이유는 내 포트폴리오를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었다. 타인의 시간을 빼앗는 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봐 줬으면 했다. 잠을 설쳐 가며 온 힘을 다해 만든 포트폴리오를,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일을 끝맺어야 할 때 끝맺을 용기를 드디어 낼 수 있게 된 나의 변화, 성장, 여정을 내보이고 싶었다. 자랑하고 싶었다. ‘그까짓 거’, ‘별로’라고 평가받을 수 있겠지만, 부정적인 평가의 주체가 전문가들이라면 그나마 상처가 덜할 거 같았다.
전문가들 앞에 내보인 것만으로 만족하자. 기대하지 말자. 연락이 안 오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꼭 그렇게 하자고 다짐했지만, 서류 접수 마감일이 지나고 한동안 내 눈은 핸드폰을 떠나질 못했다. 잠깐 핸드폰을 두고 간 사이 혹시 연락 온 데는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거절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거절당해도 의연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거절이 확실해지자 나는 전혀 의연할 수 없었다. 실망스러웠다. 나 정말 못하나 봐. 그래도 재능은 있는 줄 알았는데. 앞으로 얼마나 많은 거절을 당하게 될까. 지금의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상황은 얼마나 계속될까. 영원히 이어지는 건 아닐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영영 없으면 어쩌지? 영영 쓸모없는 사람으로 남게 되면 어쩌지? 다가오지 않은 미래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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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부터 대학에서 편집 디자인을 배우기로 했다. 국비로 지원되는 1년 비학위 과정으로, 개강까지 이제 2주도 채 남지 않았다. 편집 디자인을 조금 더 시간을 들여 더 깊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컸지만, 한편으로 소속감이 필요했다. 강제성 있는 환경이 주는 안정감이 절실했다.
포스터를 한 달에 두 개 이상 만드는 커뮤니티 활동도 시작했다. 지금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잠재우려면, 나의 가능성을 나에게 계속 증명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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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도서 편집자로 일할 때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만족이 안 돼 힘들었다. 남들은 이만하면 됐다고 말해도 내 작업물이 좀처럼 내 성에 차지 않아, ‘분명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하는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해서, 내 부족함을 인정하는 게 못 견디게 힘들어서 일을 끝맺기를 늘 어려워했다. 자신의 존재가 자신에 수치스럽다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디자인을 할 때는 달랐다. 내가 수치스럽지 않았다. 자기만족이 됐다. 내가 이미 할 만큼 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한계를 받아들이며 일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나는 내 자격지심으로, 내 욕심으로 동료들을 고생시키는 일을 더는 경험하고 싶지 않고, 디자인을 하면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의심이 들고 겁이 난다. 내 능력이 자기만족에 그치면 어쩌지? 나는 디자인으로 밥벌이를 하고 싶다. 그러려면 남들의 인정이 필요할 텐데. 남들을 만족시켜야 할 텐데.
나, 지금 시간 낭비하고 있는 건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모두 쓸데없고 무의미한 짓 같았다. 작업물을 보며 스스로에게 박수 쳐 주던, 미숙한 구석조차 나답다며 귀여워하던, 모니터 앞에서 히죽이는 내 얼굴을 사랑스러워하던 모습은, 그 당당하던 태도는 다 어디로 가 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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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잠을 설치고,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고,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대고,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든 마무리 짓는 것밖에 없다며 몸부림친 끝에 마침내 공모전에 낼 캘리그라피를 완성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나는 부족함 많은 내가 고스란히 담긴 작품을 공모전에 접수했다. 무언가를 완성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자. 당선되지 않더라도 기죽지 말자. 뭐, 기죽어도 할 수 없지. 기죽은 모습의 나도 너무 미워하지 말자. 그럴 수 있다고 다독여 주자. 나는 또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되뇌었다.
느지막한 오후 밀린 잠을 청했다. 마음 한구석에서 또 못된 소리가 들렸다. 벌써 자게? 뭘 했다고? 소리 내어 맞섰다. 왜 한 게 없어? 공모전 작품 완성해서 냈잖아. 내가 그동안 마음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지금부터 아무것도 안 하고 쉴 자격 충분히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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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친한 언니에게 요즘의 불안에 대해 털어놓았다. 언니가 말했다. 이제 막 걸음마 뗀 아기랑 마라톤 선수들이랑 실력을 비교하면 어떡하느냐고. 그렇지. 그건 그렇지. 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나에게는 분명 재능이 있다고 했다. 정말일까? 빈말 아닐까. 내가 아는 이 언니는 진심 없이 말하는 법이 없지만, 빈말이었다 해도 상관없다. 충분히 위로가 됐으니까. 빈말로라도 내 미래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생각해 보면 자기만족이면 또 어때서. 자기만족의 힘으로라도 나를 미워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않을까.
나에 대한 기대, 욕심이 많으니 빨리 뭔가를 이뤄 내야 한다는 조급함이 드나 보다. 지금 막 걸음마 뗀 아기한테 그런 걸 바라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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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을 배우기 전까지 나는 늘 몸과 마음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살았다. 힘을 주고서 사는 건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나는 내가 힘을 잔뜩 줘 만든 작업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힘을 뺀 날 것의 느낌이 있는, 보는 이에게 위압감보다 편안함과 재미를 주는 단순하고 위트 있는 작업물을 선호했고, 나 또한 그러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별 생각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쓰고 그려야 마음에 드는 작업물이 나왔고, 이렇게 나온 작업물이 훨씬 나답고 독창적이었다.
힘을 빼려고 늘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도서 편집 일을 할 때는 아예 불가능했다. 하지만 디자인을 할 때는 힘을 빼는 게 가능했다. 매번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꽤 높은 확률로 해내고는 했다.
앞서 학원에 다닐 때 선생님이 해 준 말이 있다. 나는 트렌드를 잘 쫓는 편은 아니지만(정확한 평가다. 쫓을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작업물에는 개성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나는 개성 있는 디자이너를 좋아하고, 나 또한 나만의 색깔이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어디로 튈지 모르게 엉뚱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집불통에, 모자람과 구멍이 많지만 그래서 친근하고 귀여운, 나라는 인간이 온전히 담긴 디자인으로 먹고살고 싶다. 나다운 디자인으로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고 사랑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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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금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지 않으면 나중에 또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남들의 시선에 짓눌려 살았던 20대의 나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은 다 저마다의 경험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모두가 똑같은 길을 걸을 수 있겠는가. 남이랑 비교하지 말고 나대로 가자. 나답게 하자. 맞지도 않는 신발에 억지로 나를 구겨 넣지 말고, 나한테 꼭 맞는 신발을 신고서 나의 길을 가자. 미숙하면 미숙한 대로 앞으로 나아가자. 그 또한 나다운 거니까.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나의 세계를 넓혀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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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간을 정의하는 말로 ‘그냥 쉬었음’은 역시 적절하지 못한 것 같다. 더 잘 살고 싶어서 매일같이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그냥 쉬었음’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25.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