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음 소희>, 2023
자주 다니는 도서관에서 영화 <다음 소희>의 특별 상영회가 열렸다.
영화 속 주인공 ‘소희’는 특성화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이다. 소희는 활달하고 씩씩한 아이다. 춤을 좋아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않는다. 소희는 학교 선생님 말에 따르면 소위 ‘대기업’이라는 곳으로 현장 실습을 나간다. 소희는 이제 자신도 사무직 직원이라며 한껏 부푼 마음으로 회사에 출근하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대기업이 아니라 대기업 통신업체의 하청 콜센터였다. 표면상으로는 통신 서비스 가입자들의 민원을 해결해 주는 곳이지만, 실상은 가입자들이 서비스 해약을 못 하도록 온갖 수단을 다해 막고, 새로운 서비스에 더 가입하도록 끈덕지게 설득하는 곳이었다.
기대했던 것과 조금 다른 일이기는 해도 소희는 씩씩한 아이답게 잘 해내려 노력한다. 하지만 전화를 통해 온갖 욕설을 듣고 성희롱까지 당하는 일이 하나둘 쌓이면서 소희는 점점 피폐해져 간다. 어떻게든 버티며 회사에서 요구하는 실적을 쌓지만, 회사는 그런 소희의 노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 실적 1등에 오를 만큼 성과를 내도 소희가 ‘실습생’이라는 이유로 입사 당시 약속했던 인센티브를 주지 않는다.
더는 견딜 수 없었던 소희. 소희는 회사를 그만둘 결심을 한다. 그러자 소희에게 비난과 협박이 날아든다. 회사는 소희가 돈독에 오른 아이라고 욕하고 학교에 항의할 거라며 겁을 준다. 학교는 힘들게 뚫은 취업처인데, 첫 입사자인 소희가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하면 회사에서 다음에 학교 후배들을 어떻게 받아 주겠냐며 소희를 압박한다. 소희가 그동안 무슨 일을 당했는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이 못하고 모자란 부분이 있으면 어떻게든 연습하고 노력해서 잘 해내고야 마는 끈기 넘치고 씩씩한 소희가 어쩌다가 이렇게 의기소침해졌는지, 웃음 많고 생기발랄하던 아이가 어쩌다가 눈물과 악밖에 남지 않은 바싹 마른 이파리가 되어 버렸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기댈 곳도, 도망칠 곳도 찾지 못한 소희는 결국 눈발이 날리는 어느 겨울날 차가운 강물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실화이다.
소희가 ‘죽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너무 슬프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든 감정은 ‘분노’였다. 소희를 죽음으로 내몰아 놓고는 소희가 문제 있는 아이라고, 자신도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희를 그런 곳에 보낸 거라고, 자신들이 무슨 힘이 있어서 현장 실습 구조를 바꿀 수 있겠냐며 자신들은 아무 잘못 없다고 발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너무 화가 났다. 소희의 죽음은 교육부가 아이들이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했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학교가 아이를 그런 끔찍한 곳에 보내지 않았으면 막을 수 있었던 일이다. 회사가 끔찍하고 불합리한 노동 환경을 만들지 않았다면 애초에 있지도 않았을 일이다. 노동자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은 관리자와 회사의 기본 의무다. 학생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은 교육부와 학교가 해야 할 기본 중의 가장 기본 역할이다. 제 할 일을 하지 않고서 아이를 사지로 내몰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방관한 교육부와 학교, 회사가 어떻게 감히 자신들은 죄가 없다는 말을 입에 올리는가. 어쩌면 이 가해자들은, 이 살인자들은 처음부터 소희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특성화고 시스템이 아무런 잡음 없이 굴러갈 수 있게 하는 부품, 회사의 이익과 나의 이익을 만들어 내는 소모품 정도로만 여겼을지 모른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게 과연 소희만의 이야기일까? 내 오빠는 실업계 고등학교, 그러니까 오늘날의 특성화 고등학교를 나왔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꽤 잘하던 오빠는 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그리고 졸업반이 되자 뜬금없이 생활용품 제조 공장으로 현장 실습을 나갔다. 어느 날 일하는 곳에서 만든 거라며 집에 발 각질 제거 용품 대여섯 개를 가져온 게 기억난다. 나는 오빠가 왜 애니메이션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곳에서 실습을 하는 건지, 미성년자가 공장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의아하고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오빠에게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지금 오빠에게 묻고 싶다. 실습을 나갈 때 오빠에게 일터의 선택권이 있었는지, 일터에서 어른들의 충분한 보호를 받고 노동자로서 정당한 존중을 받으며 안전하게 일했는지를 말이다. 한편으로는 대답을 듣는 게 겁이 난다. 소희의 이야기가 오빠의 이야기였으면 어쩌지? 오빠가 ‘살아남은 소희’였으면 어쩌지? 나 또한 소희가 보낸 죽음의 신호를 무시하고 등 돌린 방관자였으면 어쩌지?
영화 상영 뒤 이어진 ‘감독과의 만남’에서 한 관객이 말했다. 영화를 보면서 너무 화가 치밀었다고, 하지만 우리 같은 소시민이 사회 고발 영화를 본다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냐고 물었다. 관객의 목소리에는 부당한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해 뭔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처지에 대한 답답함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감독이 뭐라고 답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말했던 거 같다. 담담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나도 감독의 말에 동감했던 건 기억난다.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다. 모두가 투사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감시자’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특성화 고등학교 아이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 현장 그리고 그들과 그들의 가족인 우리에게 일어나는 부당한 사건 사고를 주시하는 것, 서명 운동과 불매 운동 등의 사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으로도 잘못된 사회 구조를 바로잡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지 않을까? 감시하는 소비자와 노동자, 시민이 많아지면, 기업과 나라도 더 겁을 먹고 타의로라도 학생과 노동자들을 더 보호해 주지 않을까? 나에게 벌어진 일의 불합리함을 알아채는 것, 그들이 당하는 불합리한 일에 함께 분노하는 것, 불합리한 일을 당하며 힘듦을 호소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것, 차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는 아이와 노동자에게 <다음 소희>의 어른 주인공 ‘유진’처럼 “나한테는 말해도 돼.”라고 말해 주는 것.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들에 무관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음 소희’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영화 속에서 슬리퍼만 신고 강물로 향하던 소희의 맨발이 너무 시리고 아려 보였다. 영화가 끝날 즈음, 소희가 강물로 향하기 전 외딴 가게에서 술을 마시던 장면이 생각났다. 어두운 가게 안 문틈으로 한 줄기 햇살이 새 들어와 소희의 맨발에 닿았다. 소희의 마지막을 떠올리며 나는 발끝에 닿았던 한 줄기 햇살이 소희의 시린 발과 마음을 잠시라도 덥혀 주었기를 간절히 바랐다. (23. 1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