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 ː 無害
나는 오래도록 가까이 지내는 일을 선의로 여겨왔다.
생일이면 연락을 했고, 경조사는 빠지지 않았으며, 명절과 새해의 인사는 마치 규칙처럼 반복했다.
베푸는 일은 특별한 선택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였고, 나누는 태도는 나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왜 그렇게 살았는지 묻는다면, 나는 아직도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그 안에서 분명한 만족이 있었고, 그 만족이 의심을 잠재웠다는 사실만은 기억한다.
이러다보니 사람과 가까워지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마음을 열면 관계는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베푸는 호의만큼 가까워졌다.
나는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았다. 가까움은 기쁨을 낳았고, 기쁨은 다시 나를 그 자리로 불러왔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 모든 과정은 양면을 가진 거울과 같았다.
나는 기쁨을 주는 만큼 상처를 주었고, 상처를 주는 만큼 상처를 받았다.
그때의 나는 그것을 균형이라 불렀지만, 실은 조절하지 못한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거리를 두는 법을 알지 못했다.
가까이 있는 것이 성실함이라 믿었고, 물러서는 일은 차가움으로 오해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리를 두면 마음이 멀어질까 봐서였을까, 혹은 그보다 더 단순하게,
그렇게 하면 내가 외로워질까 봐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까움은 언제나 기대를 동반했다. 기대는 자연스럽게 생겼고, 나는 그것을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마다 나는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는 다시 말이나 침묵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상처는 한 방향으로 끝나지 않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은 채 흘렀다.
나는 그 흐름 속에서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였고,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그것이 나를 지치게 했고, 오래 아프게 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무해해지기 위해, 모든 것을 멀리 두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남겨두기로 했다.
완전히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가까워 서로를 찌르지 않는 간격을 찾는 쪽을 택했다.
추운 겨울을 견디기 위해 고슴도치들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되, 끝내 하나가 되지 않는 거리처럼 말이다.
나는 아직 이 방식이 옳은지 확신하지는 못한다.
다만 이전보다 덜 상처를 주고, 덜 상처받으며, 그만큼 나 자신을 조금 더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전과 다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