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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쿄킴 May 17. 2018

내가 이러려고 제주도에 왔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디자이너 사용 안내서’ 연재를 시작하며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큰 물에서 놀아라!라는 뜻이었겠지만, 지나치게 격언에 충실했던 우리는 심각한 부작용과 마주하게 됩니다.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살고, 공학에 특화된 일부 대학을 제외하고는 좋은 평가를 받는 대학들이 모두 한 도시에 있는 나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말이 이제야 천천히 와 닿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현저한 지역 간 격차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떠나 한적한 지방에서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대전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서울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했습니다. 직장생활에 잘 적응한 편은 아니어서 몇 번의 이직을 겪었고, 그렇게 건조해진 마음을 달래려고 떠난 제주도 여행에서, 저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제주에서 살고 싶다…


물론 지금 생각해봐도 무모하고 대책 없는 선택이었지만, 어느새 제주로의 이주를 준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초기의 제주생활은 평화롭고 행복했습니다. 무엇보다 일과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가 적었고, 따뜻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에 취해 1년여를 보냈습니다. 그때 나이가 서른셋, 다시 스멀스멀 미래에 대한 걱정들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몇 달의 고민 끝에 다시 제주에서 디자이너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제주에서의 직장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서울에서는 밀려들어오는 프로젝트와 엄청난 작업량이 부담이었다면, 제주에서는 디자인에 대한 인식 부재,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 터무니없이 적은 비용 등이 직장생활을 힘들게 했습니다. 직장생활이 다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몇 년 동안을 꾸역꾸역 버티다가, 얼마 전 스스로 회사를 차려 독립하기에 이르렀지만, 지역사회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까지 해소되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이러려고 제주도에 왔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제주의 대형 관광지 리플릿 디자인을 맡게 되어, 2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수차례에 걸쳐 시안을 제출했지만, 클라이언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말만 반복할 뿐,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원하는지, 무엇이 더 필요한지도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하는 작업자로서의 어려움도 컸지만, 무엇보다 치명적으로 다가온 것은 그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저를 설득하려고 하지 마세요.


물론 실제로 디자인 시안이 클라이언트의 의도와 같지 않았을 수도 있고, 기대와는 달리 현저하게 품질이 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클라이언트가 보여준 무성의한 태도와 언행을 생각하니, 억울하다 못해 자존감마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대기업이나 외국계 기업들과 함께 일할 때도 일 못한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는데……'


처음에는 내가 뭘 잘못한 건지 몇 날 며칠을 고민했고, 나중에는 이해할 수 없는 클라이언트의 취향과 언행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대개 이런 경우는 안 좋은 결론으로 마무리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지지부진한 기획과 수정을 몇 차례 더 반복하다가 결국 디자인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클라이언트에게 더 이상 작업을 진행하기가 어렵겠다며 프로젝트 중단을 요청했고, 몇 달간의 작업비용도 당연히 받지 못했습니다.


제주살이 6년 차… 디자이너로서의 고민


저는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이끌리듯 제주로 내려온 지 6년 차가 된 1인 사업가이자 디자이너입니다. 가끔은 지리적, 사회적으로 폐쇄적인 제주를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기도 하지만 도시가 아닌 지역을 기반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지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에 대해 자주 고민합니다. 그래서 10여 년간 서울과 제주에서 현업 디자이너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차이점’과, 지역사회에 디자인이 필요한 이유, 디자이너로서 할 수 있는 것들과 해야 할 일들, 존재하는 문제점과 한계 등에 대한 저 나름의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자칫 특정 지역에 대한 험담이나, 일 못하는 디자이너의 푸념 정도로 보일까 봐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조심스러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에피소드와 디자이너로서의 의견 정도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본 콘텐츠는 Kakao 클래스 우수 프로젝트로 선정되어, 콘텐츠에 대한 멘토링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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