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찬 24년 계획을 세웠다. 30권 이상의 정치/경제/역사 서적 (소설, 에세이 제외)을 읽고 서평 또는 감상문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1년이 52주이니, 1주에 1권 정도 읽고, 가끔 소설을 읽어도 무리한 스케쥴은 아닌 듯 보인다. 어영부영 새해가 밝고 첫 스타트를 끊었다.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
상하이와 홍콩의 느낌은 도시의 느낌은 유럽과 비슷한 서구적이지만, 속은 중국이다. 몇번 여행과 출장을 통해 느낀 도시들의 기억에 '유대인'은 없었다. 하지만, 상하이에서 엄청 유명한 페어몬트 호텔, 홍콩에서 유명한 페닌슐라 호텔과 빅토리아 피크를 오르는 '피크 트램'. 이 곳들의 오너가 중국인이나 서양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우선은 굉장히 신선하고도 놀라웠다. 1800년대 중후반부터 1900년대 중반까지 상하이 홍콩의 모습을 실감있게 묘사한 덕인지 굉장히 잘 읽히기도 했다.
와이탄. 상하이에 출장갔을 때 황푸강을 따라 쭉 늘어선 유럽식 건물들, 그 중 한 4층짜리 호텔의 루프탑에서 상하이에서 주재원 생활을 하고 있던 친구를 만났다. 상하이의 역사에는 별 관심없었고, 그냥 뷰가 좋았고 친구가 반가웠다. 강 건너의 동방명주가 멋지구나 이러면서 말이다. 붉은 표지의 이 책을 읽으며 그 때가 생각나 친구에게 책 사진을 보냈다 (읽어보라고)
'서순가'와 '커두리가'. 이 두 유대인 가문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아래 내용부터는 책 내용을 보고 내 맘대로 생각한 내용이라 책의 워딩과는 차이가 있다) 서순가는 철저히 영국적이다. 스스로를 영국 귀족이라고 생각할 지언정 유대인 또는 아시아에 융합된 유대인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국이 아편을 상하이로 수출할 때 이를 장악해서 떼돈을 벌었다. 당시 영국의 주력수출품은 면화, 모직이었는데, 비단을 쓰던 중국인들에게 팔릴 리가 없었고, 반대로 영국인들은 중국의 차와 그릇들을 미친듯이 사들였다. 제국주의의 기본 특징은 무력을 바탕으로 자국의 수출품을 통해 지속적인 부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영국은 오히려 중국에 무역적자를 기록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출품이 아편이었다. 여담이긴 하지만 당시 아편은 일종의 진통제 또는 약으로 인식되어 그 중독성의 위험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아편이 중국으로 수입된 이후 청나라에서 여러 차례 중독의 위험성을 들어 수출을 하지 말아달라고 했던 요청을 영국이 묵살한 것을 보면 몰랐다고 부인만은 못할 것이다.
여튼 특히나 아편이 잘 재배되었던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상하이로 실어 나르는 '상단'이 되었던 서순가는 돈을 엄청 벌어들였다. 그 가문의 일원인 빅터 서순은 (본인이 영국 귀족이라는 믿음 하에) 영국식, 유럽식 호텔을 호화롭게 상하이에 건축하고, 장제스 등 초창기 중국정부와도 밀월을 했으며 상하이의 교통, 가스 등의 사업을 독점했다. 하지만 빅터서순의 지인이 남긴 말 "빅터는 언제나 잘못된 타이밍에 잘못된 결정을 했다."처럼 빅터 서순은 중국 공산당에 대해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 아편전쟁과 상하이 조계시절을 통해 돈을 벌고, 국민당과 일제 치하까지도 잘 버텼으나 영국귀족이라 여겼던 빅터의 시선에 중국 공산당은 너무 이질적이었고, 나쁜 사람이었을 것이다.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고 빅터는 상하이의 모든 부동산과 재산을 내버려두고 해외로 떠나게 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반면 커두리가는 공산당, 더 넓게 중국과 공생을 했다. 애초에 그는 서순가처럼 아편을 통해 한 몫 잡지 못했다. 커두리가는 서순가의 노동자였으며, 일찍부터 중국 현지의 부자들과 공생을 하며 중국을 현대화하자는 목표를 가져갔다. 특히 상하이가 제국주의, 일본, 국민당 등 정치에 휘둘리기 시작하자 그들의 부를 홍콩과 상하이에 나누었으며, 홍콩에 전기를 공급하는 회사를 설립, 운영하는 등 서순가와는 다른 행보를 걸었다. 이런 공생 덕분이었는지 커두리가는 쑨원의 부인과 매우 가까웠으며 공산당도 커두리가를 압박하는 대신 자연스레 홍콩으로 이주를 내버려두었고 홍콩에서 그의 가문은 부를 일구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생각해보니 두 가문 모두 상하이에서는 성공하지 못한듯하다. 유대인이라 하면 특유의 문화 지능 등을 배경으로 금융권에 자리를 잡고 세계 어디에서든 부를 일군다는게 일반적 생각인데, 상하이에서 이들은 무역 건설 인프라 등 다소 생소한 사업을 하며 기반을 닦았다는 점과 결과적으로 지금 상하이에는 그 흔적만 남았다는 점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하찮게 여기며 그들과 비교되는 것도 싫어했던 서순가와 그런 서순가를 바탕으로 자란 커두리가.
책장을 덮고 나니 책에서 소개된 상하이의 명소와 와이탄(황푸강)의 느낌을 다시금 구경해보고 싶어졌다. 나의 전임자이자 지금은 회사 상해본부의 대표인 피스형에게 간만에 연락을 했다.
"헤이 피스, 요즘 상하이는 어때요? 서울은 춥고 미세먼지도 심해요."
"엠제이, 중국경제가 안 좋아지는지 자꾸 외국기업들을 채근하는 느낌이야. 여기는 크리스마스도 조용하게 보내서 그런지 더 서울이 그리워"
서울에서 소주 한 잔 하자며 그와의 대화를 끝내며 퍼뜩 현실로 돌아온다. 책 속의 낭만은 책일뿐, 현실의 나는 치열함에 발을 대고 바득바득 헤쳐나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일이 안될것을 걱정만 하고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좀 두들겨 맞고 깨져도, 실패하고 고치면 그래도 조금씩은 변화가 생긴다. 그렇게 상하이와 홍콩의 유대인 제국도 만들어져서 지금의 국제도시가 된 것일테니...
나만의 규칙으로 정리되었으나, 누가 보아도 어지러운 사무실 책상엔 분석하고, 결정하고, 보스들과 상의해야 할 일들이 '내가 너의 상하이요 홍콩이다.'라며 포개져있다. 24년도 정신없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