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호바루 술탄 이브라힘 스타디움에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시작으로 한국축구는 아시아의 월드컵 단골이다. 하지만 어른들께 많이 들은 이야기는 그 이전의 것이다. 메르데카 (말레이시아어로 자유) 컵에서 말레이시아에 한국이 졌다는 이야기, 박스컵(박정희 대통령이 주최한 아시아 축구대회, Park's cup)에서 말레이시아에1:4로 질뻔한 경기를 차범근 선수가 6분만에 3골을 넣어서 4:4으로 비겼다는 이야기 등 말이다. (영상을 찾아보고 싶었으나 70년대에는 지금처럼 방송국에서 영상을 잘 관리하지 않았고, 그랬다더라라는 기사만 남아 있었다)
지금이야 한국의 월드컵 행보에 가장 큰 아시아 내의 경쟁자가 이란, 일본, 호주이지만, 당시에는 말레이시아, 버마였다고 들었다. 그런 말레이시아에 발을 들였고, 말레이시아 프로축구리그에서 2014년부터 한 번도 우승 트로피를 놓치지 않았던 팀이 '조호바루 다룰 탁짐'(JDT)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남쪽의 호랑이(Southern Tiger)로 불리우며, 그들의 유니폼에 새겨진 마크인 호랑이는 한국 국가대표팀의 그것과 묘하게 비슷해서 동질감도 느껴진다.
오랫동안 농구를 가르쳤고 농구를 좋아하길 바랬으나, 아이는 축구를 좋아했다. 그리고 반딧불투어를 같이 간 ZAK 아저씨는 JDT의 열혈 서포터즈였다. 그 이름도 재미난, JDT Pirates(조호바루의 해적들). 오가는 차에서 "저기가 바로 술탄 이브라힘 스타디움이야. 엄청난 곳이지." 라며 입에 마르게 칭찬을 했던 아저씨 덕에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도 솔깃했고, 홈경기가 열리는 토요일 밤에 경기를 보러 가기로 했다. 경기가 잘 보일만한 중앙선 부근의 좋은 자리를 미리 인터넷으로 예매하고, JDT 선수들의 기록이나 하이라이트도 보면서 경기를 볼 날을 기다렸다.
의외로 한국 여행객 중에 JDT 축구를 본 사람들은 별로 없었고, 구글에서 이런 저런 정보를 뒤졌다. 저녁 8시 15분에 시작되는 경기를 보기 위해 5시쯤 구장에 도착하기로 했다. 사진상으로 보기에 엄청 으리으리한 스타디움, 그리고 한국처럼(?) 경기 당일에는 푸드트럭이나 상점들도 많을 거라는 생각, 구글에서 검색해보니 경기장에 아이스링크도 있고, 서브웨이도 있고, 스타벅스도 있어서 재밌을 거 같다는 생각에 조금 서둘렀다. 우기여서 그런지 토요일 아침부터 하루 종일 비가 주룩주룩 내렸고, 술탄이 500억 가까이 투자해서 만들었다는 신식 스타디움이니 괜찮을거야 라고 생각하며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고 발걸음을 향했다. 과연 경기장은 으리으리했고, JDT 유니폼이나 용품을 파는 기념품 샵도 어마어마했고, 팬클럽을 위한 Pirate's room까지 뭔가 굉장히 있어 보였다.
하지만 간과한 것은 여기는 심심한 이슬람 국가라는 것이었다. 구글에서 검색해본 것과 달리 너무 작고 별 볼일 없던 아이스링크, 엄청난 스테이크를 판매하는 것처럼 보였던 샌드위치 가게 수준의 레스토랑, 한국과 달리 푸드트럭도 외부에 없고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8시까지의 시간이 꽤나 걸릴 것만 같다. 다행히 우리는 일찍 도착한 덕에 빨리 티켓팅을 하고 주경기장 안에 들어왔고, 그 안에는 IKEA 팝업 스토어와 IKEA cafe가 있었다. 어차피 아이와 배를 채워야 하니 IKEA cafe에 자리를 잡았다. 신기한 것은 IKEA cafe 한쪽문은 경기장 응원석과 바로 이어져 있어서 경기장 분위기를 바로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가드들이 몇 명 있었지만 너무 시간이 일러서인지 경기장 안을 구경하는 걸 따로 제지하지는 않았다. 아이와 함께 경기장에 살짝 들어가보니 비가 그칠 기미가 안 보인다. 비닐 비옷을 입고 지나가는 열성팬에게 물어보니 'outside에서 샀다.'고 하는데... 한국에서처럼 발빠른 비옷장수도 바깥엔 안 보인다. 반쯤 체념한 상태에서 IKEA 카페 직원에게 커피와 빵을 주문하면서, 비옷이 없어 걱정이다라고 했더니, 씩씩한 직원이 큰 목소리로 "Go to IKEA pop-up store."라며 손으로 가리킨다. 조잡한 수준의 비닐 비옷이 아니라, 등산, 캠핑에서 꽤 오래 사용할 수 있을 거 같은 제대로 된 비옷이다. 만원 정도의 가격이었는데, '이 곳은 우기이며 내일은 싱가포르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갈 건데, 비가 오지 않더라도 쥬라기 머시기를 비옷없이 타면 다 젖는다고 하더라.' 라며 스스로를 설득했고 아이와 나는 검은색 비옷을 멋드러지게 입고 경기장에 들어갔다.
유럽에서 만났던 축구장의 분위기, 한국에서 봤던 축구장과는 다른 느낌의 축구장이었다. IKEA가 축구장 안에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맥주를 마시지 않고 차나 음료수를 마시는 분위기도 정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맥주 tab이 있을법한 곳에는 어김없이 100PLUS라고 하는 음료수를 팔고 있었고, 런던의 맥주를 들이키며 전투력을 불사르던 pub의 아재들과 달리, 이 곳의 아재들은 얌전하고 다소곳하게 유니폼을 챙겨입고 같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분명히 맥주 안주인데, 닭튀김도 여기저기 많이 팔고 희한하게 이 곳 사람들은 매우 조용하게 옹기종기 모여앉아 치킨을 먹고 있다. 심지어 경기장에도 기도실이 있고, 경기 시작전, 경기중간에 '웅얼웅얼.....' 기도문같은 것도 나온다. (신기한 건 주변을 둘러봤는데 기도하는 사람이 별로 안 보였다는 거)
정작 정말 놀란 것은 경기가 시작된 후 조호 응원단의 응원을 보면서부터였다. 그렇게 조용하던 사람들이 북소리에 맞춰 엄청난 응원구호와 노래를 시작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따라하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가 저 서포터즈 바로 옆이었으면 경기 보기 어려웠겠다." 라며 아이에게 귓속말을 할 정도로 서포터즈의 응원열기는 뜨겁고 시끄러웠으며 끝이 없었다. 이 곳 사람들에게는 이 축구가 일종의 엄청난 축제인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조용하고 목소리도 내지 않는 사람들이 축구를 이유로 크게 노래도 부르고 응원구호도 외치고 말이다... 숙소 근처에 New Year를 맞이하기 위해 엄청난 인파가 몰렸고, 폭죽은 터뜨릴지언정 이들은 크게 소리지르지 않는다. 오토바이 폭주족은 있으나 역시 소리를 지르지는 않는다. 야시장이 열리고 음악이 쿵짝 쿵짝 나오고 시끄러운데, 이 곳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걸어다니며 손에 음료수 하나, 반대손엔 꼬치구이 하나 들고 있는 식이다. 신기하다.
이 곳 말레이시아에는 원주민인 말레이 사람들이 살다가 대항해시대를 맞이한 유럽에 의해 최초에는 네덜란드, 그 뒤에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영국 지배의 특징이 자치권을 주고 '영어 문화권'을 만드는 것이었기에 영국 지배 시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고 한다. 말레이시아의 핵심은 주석과 고무. 이들의 생산과 유통을 위해 중국인과 인도인이 등장한다. 중국인은 주석의 생산과 유통을 담당하는 동시에, 상인으로서 길을 닦았고, 인도인은 고무의 생산을 주로 담당했다고 한다. 말레이 원주민들은 농업에 주로 종사하고... 비중이 말레이인(70%), 중국인(20%초반), 인도인(10% 내외)인 상태로 말레이시아는 영국에서 독립하게 되었고, 3민족이 각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20%였지만 경제권을 꽤나 잡은 중국인들은 역시 차이나타운을 만들고 세력을 늘려가기 시작했으며, 70%에 달하는 말레이 원주민들은 그래도 중산층 수준으로 삶의 질은 좋아졌지만 그 이상을 누리지는 못했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이야기들의 조합인데, 팩트체크는 하지 않은 상태이다)
어찌됐든 말레이시아 프로축구 체험 결과, 경기장은 굉장히 훌륭하고 관리도 잘 되어 있으며, 한국 프로축구와 달리 용병이 11명 중 6~7명 정도라 생각보다 경기도 박진감이 넘치고 흥미진진했다. 다만 다소 어이없는 실수와 볼터치 미스 등은 프로리그라고 하기에 조금 민망한 것들도 있었다. 여튼 24년 시전에도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는 JDT는 수원삼성도, 울산현대도 꺾은 적이 있는 강팀이었기에... 현재 리그 3위인 사바FC를 4:0으로 가뿐히 제껴버렸다. 조호바루 홈팀의 경기를 직관하고, 조호바루 FC 운동복도 사서 경기를 직관한 우리는...비에 젖은 운동복을 세탁해서 후다닥 말리고 다음날 싱가폴에도 자랑스러운 조호바루 FC티를 입고 활보했다.
(지나고 보니 양평 FC 응원복을 입고, 잠실 롯데월드를 갔다 온 느낌이라고나 할까?)
JDT와 사바FC 모두에 한국인 선수도 용병으로 뛰고 있어 왠지 더 반가웠던 조호의 축구는 오래 기억에 남을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