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이른 새벽, 루이트라는 침팬지가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리고 고환까지 뜯겨나간 채 숙소 구석에서 발견되었다. 루이트는 재빨리 수술대에 올라가 치료를 받았지만, 출혈이 너무 심각했다. 수백 바늘을 꿰맸지만 역부족이었다. 뜯긴 고환은 짚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꽉 쥐어짰군요."
수의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루이트는 한때 무리의 리더였다. 1:1 싸움은 적수가 없었고, 인기도 가장 많았다. 힘과 지혜, 경험까지 삼박자를 갖춘 루이트는 완벽한 알파 수컷 침팬지였다. 그래서인지 두 경쟁자의 집중 견제 대상이었고, 결국 두 녀석의 습격을 받았다. 어리고 힘이 센 니키가 루이트의 몸을 붙잡았고, 늙고 교활한 이에론이 공격을 주도했다. 루이트가 피투성이가 된 채 철창에 쓰러져 있던 날, 아른헴의 침팬지 숙소는 소름 끼칠 정도로 적막했다. 침팬지들은 처음으로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세계적인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이 침팬지의 일상을 관찰하다가 얻은 슬픈 교훈이다. 당시 풋내기 학자였던 드 발은 저녁에 문을 잠그는 것을 깜빡했고, 큰 대가를 얻고 나서야 침팬지가 맹목적일 정도로 권력을 추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침팬지가 높은 지위를 원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서열이 높을수록 맛있는 음식과 매력적인 짝, 안락한 공간과 다수의 관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물학자들이 '자원 보유 잠재력'이라는 부르는 이 티켓이 몇 장 밖에 없기에, 침팬지들은 좋은 티켓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삶을 살아간다.
철학자 토마스 홉스 역시 유인원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
"죽음이 멈추게 할 때까지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성향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실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써 눈을 돌린다. 1922년 노르웨이의 셸데루프 예배라는 소년이 자신이 키우는 닭들에게서 서로를 쪼는 순서가 정해져 있다는 것은 발견한 이후로, 포유류 동물에게 위계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생물학자는 없다. 쪼는 순위는 이제 서열이라는 용어로 사용된다.
하지만 생물학자들은 동물에게 지배적인 행동이나 서열이라는 말을 쓰는 데 주저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지배와 복종 행동에 대해선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사회심리학 개론서에도 지배성에 대한 용어는 보이지 않으며, 정치인이나 CEO 역시 말 뿐인 책임과 희생을 이야기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 수치심을 느낄 때 행동하는 모습은 왜 침팬지의 그것과 정확하게 똑같아 보이는 걸까? 서열이 높은 원숭이가 으스대며 걷는 모습은 왜 성공한 CEO의 걸음걸이와 놀랍도록 비슷한 걸까?
우리에겐 진화된 정치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구와 가족 관계는 물론이고, 국회의사당이나 투표장에서도 지배와 복종과 관련된 행동이 자동적이고 본능적인 무언가에 의해 이루어진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정치적 마음이 여전히 무의식의 심연에서 우리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은 학점에 피해를 볼까 봐 교수 앞에서 최대한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교수는 자기도 모르게 학생의 태도와 예절을 눈여겨본다. 직급이 낮은 직원은 상급자에게 먼저 밝고 명랑하게 인사하고, 상사는 퉁명스럽게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친구 사이에서도 싸움을 잘하고 키가 큰 친구는 은근한 서열 우위를 누린다. 가족 관계에서도 형이나 누나는 동생에게 물 심부름을 시키고, 동생은 툴툴대면서도 한대 얻어맞지 않게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 군대에서는 오직 계급과 명령에 대한 복종만이 유일한 작동 원리가 된다. 사담 후세인은 아랫사람이 자신의 겨드랑이에 키스를 했는데, 아마 권력의 냄새를 맡아보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냉정하게 우리의 사회적 행동을 살펴본다면, 지배와 복종 관계가 어디에나 있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반면 침팬지는 솔직하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욕을 숨기지 않으며, 남들을 분쟁에 끌어들이는 패거리 정치를 한다. 동물원에 가보면 열 마리가 넘는 침팬지들이 서로 위협하고 쫓거나 고음의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싸움 실력은 중요하지 않다. 최대한 많은 동맹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다. 침팬지는 항상 주변 동료들을 감시와 의혹의 눈빛으로 보면서 어떻게 해야 사회적 사다리를 더 높이 오를지 고민하며 살아간다.
침팬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침팬지와 인간의 DNA는 1.6%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침팬지가 인간과 갈라진 시간은 고작 600만 년 정도에 불과하며, 해부학적 특징도 거의 비슷하다. 유인원의 사회적ㆍ감정적 삶의 뿌리는 우리와 너무 닮아있어서 명확한 구분선을 긋기란 불가능하다. 침팬지를 이해한다면, 우리가 누구인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