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불안할 자유가 있다

매트릭스로 보는 불안의 철학

by 교양이



작년에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진료받은 환자수가 172만 명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발병 전인 2019년에 비해 14.2%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특히 20대에선 42.3%가 증가한 28만 명이 불안 증상으로 병원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엄청난 증가폭입니다. 한 국회의원은 코로나 시대에 과열된 입시와 취업 경쟁 스트레스, 사회 양극화 등이 심화되며 우리 사회가 갈수록 불안한 사회로 바뀌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불안하시나요. 사는 게 불안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겁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평생 돈 걱정 안 해볼만큼 돈이 많은 사람도 불안을 느낀다고 합니다. 불안은 재산이나 지위와 무관합니다. 대신 불안은 자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자유의지와 불안의 관계에 대해 말해보려 합니다.


불안은 철학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문제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는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불안하다고 말합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선택은 항상 기회비용을 수반하며, 어느 쪽이든 선택의 대가를 동반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불안을 느낍니다. 혹시라도 내 선택이 잘못되면 어쩌나, 잘못되면 어떻게 책임을 지나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화 매트릭스를 보셨나요. 저는 매트릭스 시리즈를 제 인생 영화로 꼽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의 관계를 철학적이면서도 흥미롭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죠. 영화에서 주인공 네오는 로봇에게 지배당하는 인간 세상을 구해줄 예언자로 선택됩니다. 최선을 다한 네오는 매트릭스의 설계자인 '아키텍트'를 만나지만, 그에게서 충격적인 답을 듣게 됩니다. 사실 네오는 아키텍트에 의해 설계된 존재였으며, 네오 이전에 5명의 네오가 이미 아키텍트를 만나러 왔습니다. 네오의 역할은 연인 트리니티를 구하고 인류를 포기할지, 아니면 트리니티를 포기하고 16명의 남성과 7명의 여성을 골라 인류를 존속시킬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뒤 네오는 매트릭스 속 인간들의 데이터를 아키텍트에게 전달하고 소멸돼야 합니다. 매트릭스는 인간의 선택이라는 변수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네오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부속품에 불과했던 것이죠.


매트릭스 세상에서 살아가는 다른 인간들처럼(어쩌면 우리처럼), 네오 역시 아키텍트 앞에서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아키텍트는 이미 어떤 답을 내릴지 알고 있다며 네오를 비웃죠. 하지만 네오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연인인 트리니티를 구하는 문으로 걸어갑니다. 이전의 네오들은 사랑을 포기하고 인류의 존속이라는 이성적인 선택을 했지만, 6번째 네오는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의 선택을 합니다. 사랑을 선택한 거죠. 저는 네오의 선택이야말로 진정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만 하는 기계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네오의 선택에 따라 인간 저항군의 도시인 시온은 기계 군단의 공격을 받고, 인류는 멸종의 위기에 처합니다. 네오는 기계대왕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담판을 지으러 가다가 공격을 받지만, 그 과정에서 기계를 제어하는 초능력을 얻게 됩니다. 매트릭스라는 시뮬레이션 속 세상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거죠.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네오의 자기 확신 때문입니다. 예언은 거짓이었고, 네오는 인류를 구원할 '그(The One)'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네오는 자신이 사랑하는 트리니티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구원자라 믿고, 구원자처럼 행동합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와 미래는 결정되어 있었지만, 그 운명을 뛰어넘고 진짜 'The One'이 되어 초능력을 사용하게 된 거죠. 이는 아키텍트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였습니다.


매트릭스는 처음부터 기계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존속되고 있었습니다. 초기 매트릭스에선 모든 상황이 완벽했고 인간은 행복만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세팅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매트릭스 속 인간들은 계속 죽어나갔죠. 선택이 필요 없는 완벽한 세상에 의문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키텍트는 인간에겐 행복뿐만 아니라 불행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선택이라는 변수를 도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변수마저 아키텍트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범위 안이었기에, 아키텍트는 네오가 보일 수 있는 모든 반응을 화면으로 보여주며 이미 어떤 선택을 할지 안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네오가 예상하지 못했던 선택을 하자 상황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네오에게 감염되어 변종 바이러스가 된 스미스가 오히려 매트릭스를 위협하게 된 것입니다. 네오는 스미스를 없애주는 대가로 기계대왕에게 인간과 기계 간의 평화를 제안합니다. 네오는 매트릭스에 다시 들어가 스미스와 치열한 싸움을 벌입니다. 싸움 도중 질려버린 스미스는 네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Smith: "네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왜, 대체 왜?"


Neo: "내가 선택했으니까"



네오의 대답은 모순적입니다. 동어반복이죠. 스미스는 자유의지와 선택의 무의미함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스미스가 보기에 매트릭스 속 세상은 어차피 시뮬레이션이며, 가상 세계에서 인간이 하는 모든 선택과 행동은 진짜가 아닙니다. 진짜 현실세계에선 기계와의 전쟁에 패배할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환상이며, 인류를 구하겠다는 네오의 선택 역시 실패할 것이 분명한데 왜 포기하지 않느냐는 것이 스미스가 묻는 질문의 의도입니다. 스미스는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 운명론자이며, 결정된 미래 속에서 현재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과 행동은 의미가 없다고 보는 허무주의자이기도 합니다.


네오가 스미스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끊임없이 선택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 왔으니까요. 네오는 조력자인 오라클에게 '내가 사탕을 먹을 것을 알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사탕을 먹기로 선택할 수 있냐'라고 묻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내 선택은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죠. 오라클은 선택은 이미 했고, 중요한 건 선택을 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라클 덕분에 네오는 자신이 선택을 한 이유를 명확히 이해하게 됩니다. 연인 트리니티에 대한 사랑, 인류를 구하고 싶다는 소망, 자신에 대한 믿음까지. 기독교의 3대 가치인 믿음, 소망, 사랑을 갖추게 된 것이죠. 네오는 인류를 구원하는 데 성공합니다. 네오는 변종 바이러스인 스미스를 흡수해 기계대왕에게 소멸되고, 인류와 기계는 싸움을 멈추고 평화를 맞이합니다. 인류를 구원한 네오가 빛을 번쩍이며 소멸되는 모습은 마치 십자가를 진 예수가 인류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네오도 기적을 일으킨 것이죠.





기계라면 절대 네오의 기적을 이루어내지 못했을 겁니다. 합리적인 판단만 하는 기계라면 인류 존속을 위한 최소한의 남녀만 남기고 시온을 멸망시키는 쪽을 택했을 것입니다. 네오 이전의 네오들도 같은 선택을 했고요. 하지만 6번째 네오는 자신의 진심에 충실했습니다. 이성보단 감성을, 확실성보단 불확실성을 선택했습니다. 기계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말입니다.


네오의 선택을 보면, 희망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희망이 안정적이고 확실한 미래에서 생겨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사실 희망은 불확실성에서 비롯됩니다. 미래라는 것 자체가 원래 불확실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미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네오는 평화라는 희망을 믿기로 선택했습니다. 네오는 선택의 이유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게 잘 풀릴 거라 낙관한 건 아닙니다. 연인 트리니티를 잃을까 봐 불안해했고, 자신이 예언의 '그(The One)'가 아닐까 봐 불안해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류가 사라질까 봐 불안해하기도 했죠. 그래서 네오는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처럼요.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에 대해 실존적인 의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불안이 생겨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자유롭기에, 매 순간 스스로의 선택을 던지고 삶을 책임져야 하는 숙명을 가집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보기에 불안이라는 감정은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불안이라는 문제를 다르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오는 불안 속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사실 불확실성은 좋고 나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중립적 의미를 뜻할 뿐이죠.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불안 속에서 절망을 보느냐, 희망을 보느냐는 여전히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이 어떻든 말입니다. 다가올 결과가 어떻든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선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희망을 선택한 이유를 이해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게 바로 자유의지의 진짜 의미다. 저는 매트릭스의 메시지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불안하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삶의 역경과 고난에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우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는 불확실한, 아니 어쩌면 패배가 확실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과 기적을 보기로 선택했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대가로 잠시 불안한 것뿐이다. 불안하다는 것은 내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다, 라고요.


진화심리학도 불안에 대해 같은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불안은 잠재적인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심리적 적응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안전의 욕구가 있는데, 가까운 미래에 안전이 위협받지 않도록 사전에 찾아내고 예방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 바로 불안입니다. 불안은 나름의 장점이 있습니다. 미래에 생길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라고 우리의 뇌가 알려주는 사전 경고등이죠. 여러분은 그 경고를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았고, 용기 있게 마주하기로 선택했습니다. 결국 불안이란 잠깐 생겨나는 사소한 소음일 뿐입니다.


물론 불안에 잘못 대처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도박 같이 지나친 오락과 쾌락에 빠져들거나, 세상과 관계를 맺는 걸 포기하고 숨어들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무능력을 애써 증명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불안을 타인에게 전가하며 공격성을 드러내거나, 강자에게 복종해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도 있죠. 더 많이 소유함으로써 불안을 해결하려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 회피하는 것에 불과한 미봉책입니다. 그럴수록 불안은 더욱 커져서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됩니다. 불안은 직접 대면하는 것 말곤 해결책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실업난 속에서도 취업을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입시를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오늘 하루도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인가요? 매일 최선을 다해 사는데도 불안하시나요? 여러분은 네오처럼 불확실한 미래에 맞서 싸우는 선택을 한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때의 불안은 희망을 선택한 데에 대한 훈장이자 증거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누구나 존재의 불안을 견디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가장 인간다운 방식으로 불안에 대처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불안합니다. 글 쓰는 일이 좋지만, 저는 글을 쓸 때 가장 불안합니다. 무슨 글을 쓸지 저도 모르니까요. 나름 자료조사도 해 보고 고민도 많이 해 보지만, 막상 첫 문장을 쓰려고 하면 그전까지 해왔던 모든 준비가 의미가 없단 걸 깨닫게 됩니다. 무슨 글이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써내려 갈 수밖에 없죠. 그렇게 몇 날 며칠이고 쓴 글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민망한 수준이거나, 거의 다시 써야 할 정도로 처참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도 형편없는 글이 나올까 봐, 그동안의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갈까 봐 두렵고 불안합니다.


그래서 글쓰기의 모든 과정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한 채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완벽한 자료와 개요로 무장하고 글쓰기에 맞선 거죠. 그렇게 써 내려간 글은 논리적이었지만 무미건조해서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은 글이었습니다. 재미도 없고 생명력이 없는 죽은 글이었어요. 감정이 없는 로봇이 쓴 것 같았죠. 그때 깨달았습니다. 불안이 꼭 나쁜 것만 아니라는 것을요. 불확실성이 주는 수많은 변수들이 글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었던 겁니다. 다음부터 글을 쓸 때는 스며드는 불안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살아가려면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죠. 그 과정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어쩌면 삶이 더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여러분은 스미스처럼 허무주의자가 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네오처럼 자기 확신을 갖고 기적을 만들어내기로 선택했죠. 그러니 조금은 불안해도 괜찮습니다.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불안도 느끼지 않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겪은 경험담 중 모든 걸 포기해버린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희망을 버렸기에 어떤 두려움도 없이 그저 누워있기만 했다고 합니다. 간수가 아무리 때리고 괴롭혀도 아무 반응도 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죠. 육체는 살아있지만 정신이 죽어버렸던 겁니다. 반면 언제 누가 가스실로 끌려가지 모르는 상황에서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매일 꾸준히 면도를 하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불안했겠죠. 하지만 불안에 잠식되지 않고, 인간적인 품위를 잃지 않았기에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사는 게 정말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불행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우리 역시 모순으로 가득 찬 존재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선택을 강요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하는 일은 대부분 엉망진창이고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매 순간 선택을 강요받는 존재, 그렇기에 항상 불안에 떠는 존재. 그게 바로 우리입니다. 그 틈에 자유의지라는 철학적 환상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순되고 비합리적인 존재이기에,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불안에 온몸을 떨면서도 말입니다. 미래를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지 마세요. 그저 하고 싶은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세요. 무의식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불안이 올라와 이제 그만 포기하라며 속삭여도, 그 유혹을 이겨낼 만큼 여러분은 강한 존재입니다. 인간을 초월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부족한 한낱 인간이기에 그렇습니다. 가장 인간다운 방식으로, 어쩌면 가장 바보 같은 방식으로 불안과 맞서는 여러분에게. 언젠가 오라클이 찾아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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