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의 페르소나
퇴사가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퇴사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져서겠지요. 퇴사의 이유에는 과도한 업무 부담, 이직, 회사의 비전이 보이지 않아서 등등 여러 이유들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직장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합니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이유는 우리가 회사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특정 부서나 팀에 속해 있고, 그 속에서 명확한 직급과 직책을 부여받습니다. 해야 할 일이 명확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 또한 확실하죠.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에 의해 새롭게 규정된, 또 다른 '나'로 일해야 하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역시 직급과 직책으로 재정의된 또 다른 나로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며 일해야 합니다. 함부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였다간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꾹 참고, 회사가 원하는 나로 행동해야 합니다. 부당한 상사의 지시도 일단 웃으며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합니다. 나의 역할과 행동의 범위는 정해져 있고,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반나절을 회사가 원하는 나로 있다 보니, 퇴근하고 나면 항상 피곤하고 이불에 누워만 있고 싶습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인격을 '페르소나'라고 합니다. 원래 페르소나란 단어는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의미했습니다.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이 자신의 심리학 개념에 차용하면서 유명해졌죠. 페르소나는 개인이 사회 속에서 적응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쓰는 가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바꿔 쓰며 살아갑니다. 페르소나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과 사회적 요구 사이에서 타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속마음은 깊이 숨긴 채로 말입니다.
페르소나는 어릴 때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받는 교육, 또래친구들과의 관계, 사회적 교류 등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성격들이 서로 만나 중화되면서, 개인의 성격은 평균값에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통해 페르소나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성인이 되면 그때그때 가면을 바꿔 쓰고 연기하는 데 익숙해집니다. 그래서 셰익스피어가 '인생은 무대 위의 연극이다'라고 말한 건지도 모릅니다.
페르소나는 대인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되도록 도와주지만, 지나치면 문제가 됩니다. 페르소나가 아무리 유용해도, 결국은 잠시 썼다 벗어야 하는 가면입니다. 진짜 내가 아니란 뜻입니다. '진짜 나'는 기꺼이 페르소나에게 자아를 빌려주지만, 시간이 지나도 자아를 돌려받지 못하면 불안해합니다. 자신의 본모습을 잃어버릴까 봐, 내가 만든 도구적 가면에게 나를 먹혀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심리적 고통을 겪게 됩니다. 자기를 잃어버린 대가로 허무함, 원인 모를 불안,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예 페르소나에게 자신을 먹혀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만든 페르소나에 먹혀버린 존재를 '야누스(Janus)라 부릅니다. 1월(January)의 어원이기도 한 야누스는 원래 두 세계의 출입문을 관리하는 로마의 신이었습니다.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신이었지만, 중세부터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인격을 지닌 사람을 이르는 말이 되었습니다. 페르소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가면에 지나치게 몰입해 독선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이 됩니다. 회사에서 온순하고 선한 사람이, 가정에서는 폭력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이유입니다.
살아가면서 페르소나가 지나치게 강한 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퇴사를 결심하는 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비슷한 상황에서 퇴사했고요. 가면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거든요. 무게에 짓눌리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가면을 벗을 수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나를 잃어버리겠다는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융은 자신의 목표는 사람들이 타고난 전체성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융이 보기에 심리학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이란 그저 착하기만 한 존재가 아닙니다. 페르소나같이 분화된 인격의 여러 부분을 통합시켜 진정한 나인 '자기(Self)'를 되찾고 개성을 실현하는 사람이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요. 자기는 페르소나처럼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기제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있습니다. 자기에게로 들어가려면 우선 페르소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나를 되찾는 출발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위선적인 존재라는 점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진짜 나'와 '가면을 쓴 나' 사이의 차이를 긍정하고 페르소나와 적절한 거리를 둘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만, 어떤 경우에도 가면이 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했습니다. 나를 정의하는 모든 가치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뜻이에요. 한국 사회는 지금까지 '부모로서의 나', '학생으로서의 나' , 'ㅇㅇ회사 영업부 대리로서의 나'라는 페르소나 모델을 실존보다 중요시해 왔습니다. 가면의 주인보다 가면을 더 중요하게 여겨온 것이지요. 그 탓에 우리는 가면을 벗고 살아가는 법을 잃어버렸고, 그 대가로 행복하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자 자크 라캉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조차 사는 게 허무하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원하는 것을 다 얻으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막상 다 이루고 보니 행복하지 않다고 합니다. 가면을 쓴 내가 욕망하는 것과, 실존으로서의 내가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를 최대한 빨리 알아채고, 나라는 주체의 욕망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행복의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가면을 썼다면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균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잠시라도 세상과 거리를 둔 채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나만의 상황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내 어리광을 받아줄 수 있는 연인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지요?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나만의 취미를 가지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SNS는 잠시 내려놓는 것이 좋습니다. SNS 속의 세상은 사람들이 자신의 페르소나를 화려하게 드러내고 연기하는 가면극무대거든요. 연극을 관람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무대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럼 쉬는 날에도 마음은 편하게 쉬지를 못합니다.
가면을 벗고 오롯이 혼자 있는 순간, 우리는 고독해질 수 있습니다. 고립은 외로움을 의미하지만, 고독은 휴식을 의미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잠시 가면을 벗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안식일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