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와 개

by 교양이


충북 충주는 사과로 유명하다. 충주 사과는 일조량이 많고 기온이 낮아 과육이 단단하고 당도가 높다. 나무에서 막 딴 사과를 베어 물면 아삭하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저항감이 느껴지고 달큰한 사과향이 입 안에 퍼진다. 전국 최고의 사과라는 타이틀답게 충주의 도로변에는 귀퉁이마다 사과나무가 심어져 있고 추석을 앞두고 달이 차오를 즈음에는 사과의 속살도 차오르고 껍질은 시뻘게진다. 명절 전에 출하해야 값을 최고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농부들은 새벽 이른 시간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사과를 따고 선별해야 한다. 그 시기의 충주는 엄연한 사과 공화국이 된다.


부모님은 충주에서 사과 과수원을 운영하신다. 취미로 시작한 주말농장은 어느새 본업과 부업의 경계가 분간되지 않을 정도의 규모가 되었다. 농장주의 아들인 나는 사과를 한 입 먹고 맛이 없으면 버리는 사치를 부리거나 땅에 떨어진 사과를 야구공 삼아 던지는 연습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땅에 던져진 사과는 농장에서 키우는 개들이 열심히 쫓아가는 장난감이 된다. 물론 개들은 물어온 사과를 다시 내게 갔다 주지는 않고 그 자리에서 자기들이 맛있게 먹는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강형욱 훈련사라면 과연 이 똥개들이 나에게 사과를 다시 갖다 주도록 훈련시키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 들곤 했다.


과수원에는 개가 4마리나 있는데, 가장 오래된 녀석은 사람으로 치면 환갑잔치를 해야 하는 나이가 됐다. 또 다른 녀석은 사람으로 치면 서른 중반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생물학적 나이가 나와 비슷한 탓에 나는 그 녀석을 항상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 시골의 정서에 걸맞게 이름은 깡돌이라 지었다. 깡돌이는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새끼 때부터 항상 두 발로 사람 다리를 붙잡고 앵겨붙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먹는 걸 좋아한다. 깡돌이는 개밥이든 사과든 제사를 지내고 남은 과자든 항상 맛나게 먹는 탓에 나는 언젠가부터 사람의 시시한 먹방에는 만족하지 못하게 됐다. 대추가 불 그래지고 감이 익는 가을 끝무렵에는 내가 주는 홍시를 너무 많이 받아먹다가 변비에 걸린 적도 있다. 그때 나는 개가 변비에 걸릴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깡돌이 먹방의 화룡점정은 뼈다귀 먹방이다. 감자탕이나 족발을 먹은 날에는 녀석도 포식을 하는 날이다. 내가 돼지 뼈다귀를 들고 오는 걸 본 순간부터 깡돌이의 꼬리는 일정한 리듬을 따라 격렬하게 흔들리고 입에선 침이 줄줄 흐르기 시작한다. 개의 치악력은 140kg이라 깡돌이는 사람이 씹어먹을 수 없는 등뼈도 와그작와그작 씹어먹을 수 있다. 족발을 먹은 날 돼지 뒷다리 뼈는 너무 커서 씹어먹지 못하지만, 아이들이 앞니로 샤베트를 긁어먹듯이 최대한 갉아먹고 하루 종일 물고 빨고 품에서 놓지 않는다. 그만큼 깡돌이에게 뼈다귀는 신 같은 존재다. 깡돌이가 가장 야무지게 먹다 보니 나는 깡돌이에게 먹을 걸 가장 많이 주는 차별을 저지르고 그 앞에 앉아서 자주 멍하니 먹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깡돌이는 뼈다귀를 뜯을 때 가장 행복해 보였다.


개가 먹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개가 산책하는 것 이상으로 먹을 때 행복해한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개밥을 주건 사람이 먹고 남은 음식을 주건 살은 다 발라먹고 남은 뼈를 주건 개들은 항상 맛있게 먹는다. 그리고 씹기보다는 삼키거나 마신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빨리 먹는다. 주는 사람 입장에선 천천히 씹으며 맛을 음미하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빨리 먹어서 왠지 모를 서운함을 자아내게 한다. 다 먹고 나선 갑자기 음식이 사라져서 한입도 못 먹었다는 듯 순진한 눈망울로 주인을 바라본다. 그럼 애교에 마음이 약해져서 하나 더 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빨리 먹는 개의 습성은 조상인 늑대로부터 비롯됐을 것이다. 무리 생활을 하는 늑대들 사이에선 잡은 사냥감을 두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최대한 빨리 먹는 쪽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늑대의 후손인 개 역시 그런 이유로 최대한 빨리 먹는 것이다. 나는 깡돌이가 뼈다귀 해장국 2인분의 뼈를 10분도 안 돼서 끝장내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개는 먹을 때 다른 의미가 끼어들지 않는다. 개는 배고픔을 채우고 생존하기 위해 먹는다. 맛을 음미하거나 아껴먹는다는 조건은 없다. 먹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기 때문에 어떤 음식이든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뼈는 누룽지를 먹듯이 바사삭 깨물어 먹고, 국물은 긴 혀를 국자 모양으로 오므려서 마시듯이 먹고, 삼킬 수 있으면 한입으로 꿀떡 삼켜버린다. 개에게 맛있게 먹기 위한 조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개는 먹이를 항상 목적으로 대하기 때문에 먹는 것에만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


사람은 개처럼 먹지 않는다. 사람은 먹기 위해서 먹지 않는다. 배고프지 않을 때 먹고, 배고플 때 먹지 않는다. 먹고 싶은 음식만 먹는가 하면,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기도 하고, 먹기 싫은 음식을 먹을 때도 있다. 먹는 행위에 시답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거나, 한 번을 맛있게 먹기 위해 시간과 돈을 낭비하기도 한다. 맛뿐만 아니라 분위기, 플레이팅, 같이 먹는 동료, 먹으며 볼 영상, 같이 먹을 술 같은 조건을 꼼꼼하게 따지기도 한다. 심지어 그렇게 먹고도 만족하지 못해 투덜거린다. 깡돌이가 인간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판단할 수 있다면, 사람이 먹는 모습을 보고 꼬리를 절레절레 저을 것이다. 깡돌이는 배가 고프면 4년째 먹어 왔던 개밥도 처음 먹었을 때처럼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아니 자랑스럽게도 나도 개와 같은 방식으로 먹은 적이 있다. 열대야가 가시지 않은 7월의 여름밤이었다. 당시 나는 신병교육대 훈련생이었고 완전군장을 한 채 40km 행군을 하고 있었다. 김일성도 포기했다는 양구의 산기슭 언덕 아래로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행군의 마지막 고비인 헐떡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고갯마루를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며 나는 죽기 전 마지막 소원으로 코카콜라 1.5L 페트 한 병을 원샷을 하는 망상에 빠져들었다. 군복은 땀으로 절어 끈적였고, 물집이 터져나간 발바닥은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1965년에 만들어진 수통에 담긴 녹물을 마셔야 하는가의 고민을 진지하게 하던 찰나, 다행히 행군이 끝났다. 출발지로 되돌아왔을 때는 취사병들이 반쯤 뜯어놓은 육개장 컵라면을 쌓아놓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40km 행군에 당당히 성공하고 돌아온 훈련병이라기보다는 군내 나고 질척이는 군복을 걸친 채 라면 국물의 향기에 껄떡거리는 거지 무리에 가까웠다.


그렇게 각자 하나씩의 육개장을 보급받았고,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물은 이미 식어버린 지 오래라 미지근했다. 면발은 익었다기보다 팅팅 불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했고 씹을 때마다 버석거렸다. 하지만 그때 먹은 라면은 살면서 먹은 라면 중에 가장 맛있는 라면이었다. 그 순간 나는 정확히 개와 같은 방식으로 라면을 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맛을 음미하지 않았고 아껴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곁들여 먹을 김치를 바라지 않았다. 사실 그게 라면이든 쌀국수든 종류는 중요하지 않았다. 뭔가를 먹을 수 있다는 게 행복이었으니까. 나는 일분도 안 돼서 덜 익은 컵라면을 먹어치웠고 스프 알갱이가 씹히는 라면국물도 남김없이 마셨다.


개처럼 먹는다는 것은, 덜 익은 라면을 행복하게 먹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개가 먹는 모습을 보고 추잡하고 교양이 없다고 손가락질하지만, 사실 개는 가장 철학적인 방식으로 밥을 먹는다. 칸트는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기준을 두 가지로 나눈다. 정언명령과 가언명령이 그것이다. 정언명령은 무언가를 할 때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 행동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정언명령에 따르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데는 이유나 조건이 없어야 한다. 누군가를 돕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가언명령은 행동에 특정 조건을 거는 것이다. 가언명령에 따르면, 사람을 구하는 이유는 사례금을 받을 수 있어서다. 이때 사람을 구하는 행동은 수단이자 도구가 된다. 그래서 칸트는 무언가를 할 때 예상되는 결과를 고려하지 말고, 수단과 조건을 따지지 않고 행동하라고 말한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윤리 수업 시간에 배웠지만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던 칸트의 명령은 깡돌이가 뼈다귀를 씹는 걸 보면서, 내가 육개장을 개처럼 먹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생명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 순간 처음으로 칸트의 정언명령을 제대로 이해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음식을 목적으로 대하며 먹었다. 육개장 사발면보다 비싸고 맛있는 음식은 많이 먹어보았지만 음식을 가장 음식답게, 만족하며 즐겁게 먹어본 순간은 그때가 유일했다.


나의 행동과 판단이 다른 도구적인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자체로 목적과 일치하는 삶. 인간과는 다르게 개들은 항상 행동과 목적이 일치하는 삶을 산다. 개가 사람보다 나은 점을 대라면 아마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무엇이든 항상 진심으로 대하는 그 순수함을 대고 싶다. 도구적 인간인 사람은 개처럼 정언명령에 따르는 삶을 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개를 키우며 그 순수함에 위안을 받는 걸지도 모르겠다.


깡돌이는 항상 그랬다. 내가 무엇을 주든 맛있게 먹었고, 내가 떠나면 낑낑대며 진심으로 슬퍼했고, 내가 나타나면 두 다리를 붙잡고 꼬리를 흔들며 기뻐했다. 반면에 내가 행위의 목적에 충실했던 때는 육개장 사발면을 먹었을 때가 유일했다. 나는 내 인생을 깡돌이처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할 수 있을까. 내가 다시 그때와 같은 순수함으로 육개장을 먹게 되는 날이 올까. 오늘 저녁에는 다시 개처럼 먹어보기 위해 잠시 편의점에 들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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