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이 맛있는 이유

by 교양이



결국 참지 못했다. 이틀을 치열하게 싸웠으나 결국 배민이 협상카드로 내건 쿠폰에 무너졌다. 치킨의 유혹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후라이드 뒷다리의 섹시한 각선미가 일단 아른거리기 시작하면, 그 아름다움에 저항하기는 불가항력적인 일이다. 하루를 참으면 사라질 줄 알았던 치킨의 유혹은 더 커져서 날 찾아왔고, 작년에도 수십 차례 달콤한 패배를 경험한 나는 올해에도 너무 쉽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마지막 자존심은 있어 비굴하게 추가 메뉴로 치즈볼과 콜라 사이즈업을 포함시키지 않았고 배달 대신 포장을 선택했다. 패잔병에게도 최소한의 자존심은 있는 셈이다.


다리를 베어 물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치킨은 왜 맛있는 걸까? 한국인의 절대다수는 치킨을 좋아한다. 나는 아직까지 치킨을 싫어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치킨은 개인의 취향에 해당하므로 치킨을 싫어하는 사람은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한국인의 0.1%가 치킨을 싫어한다 해도 거의 5만 명이나 된다. 통계적으로 절대 적은 숫자가 아니다. 치킨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전설을 한 번쯤 들어봤을 법 한데, 아직까지도 그런 소문은 듣지 못했다. 치킨에 대한 절대적 선호도와 취향의 상대성. 두 명제 중 어느 쪽이 진실일까? 이 난제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걸까? 어느덧 배가 부르고 나른해지자 나는 치킨의 딜레마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로 한다. 치킨은 반 넘게 남았고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철학적 입장부터 검토해 보기로 했다. 우선 철학은 치킨이 주는 행복에 대해 많은 답을 줄 수 있다. 이미 철학자들은 치킨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왔기 때문이다. 왜 모두가 치킨을 좋아할까? 행복이란 치킨을 먹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일까? 치킨은 진리인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치킨이 진리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도덕적 올바름은 치킨을 먹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름다움이란 완벽하게 튀겨진 황금올리브 후라이드를 의미하는가?


플라톤에 따르면 진짜 치킨은 치킨의 이데아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이데아 세상의 치킨은 식지도 않고 튀김옷이 눅눅해질 일도 없다. 당연히 배달비도 받지 않는다. 가히 천국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데아를 불완전하게 묘사한 동굴 속 그림자 세계에서는 치킨도 불완전하게 존재한다. 치킨 그 자체, 완벽한 치킨은 없다. 양념치킨, 간장치킨 같이 완벽한 치킨을 어설프게 묘사한 치킨이 다 식어서 전자레인지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현실 세계의 치킨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래서 현실 세계에서는 무와 허니 머스터드 그리고 맥주가 필요하다. 눅눅해진 그림자 치킨을 감내해야 하니까.


플라톤이 보기에 이데아 치킨을 먹을 수 있는 건 이성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철학자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눅눅하고 딱딱하게 굳은 치킨에 만족하며 살아가야 한다. 플라톤 이 욕심 많은 양반. 혼자서 이데아 치킨을 다 먹으려고 그런 꼼수를 부리다니.


치킨마저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이데아론에 마음이 상한 나는 다른 학문으로 눈을 돌려 보기로 한다. 사회학이 좋을 것 같다. 한국 사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치킨을 만드는 곳이니까. 내 의문에 해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침 치킨으로 경제학, 사회학, 철학까지 설명하는 이론의 창시자가 있다. 그래, 마르크스다. 1848년에 마르크스는 치킨이 생산되고 소비되며 그 과정에서 치킨을 튀기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소외되는지에 대해 체계적인 이론을 내놓았다. 치킨에 관한 자본론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에서 치킨은 분업에 의해 생산되는 상품이다. 누군가는 닭의 목을 꺾고, 누군가는 닭의 껍질을 벗긴다. 그렇게 만들어진 치킨은 상품으로서 일정한 화폐 가치를 가진다. 치킨을 생산하는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노동자가 만드는 치킨 가격은 노동자 자신이 파는 노동력의 가격보다 비싸다. 이 차이만큼 잉여가치가 발생한다. 잉여가치는 자본가가 얻는 이윤이자 착취의 증거다. 자본가는 착취를 통해 얻은 이윤으로 생산 설비를 확충해서 생산의 효율성을 높인다. 이제 직접 닭 염지를 하고, 뿌링클 소스를 만드는 노동자는 필요가 없어진다. 자동화된 치킨 머신 하나가 300마리의 닭을 튀길 수 있기 때문이다.


치킨을 튀기던 노동자 대부분이 해고되고 임금은 줄어든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는 더욱 부유해지고, 노동력을 팔던 노동자는 더욱 가난해진다. 자본가의 착취에 시달리던 노동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킨다. 생산수단은 국유화되고, 생산의 결과물은 평등하게 분배된다. 이제 누구나 치킨을 먹을 수 있는 유토피아 세상이 도래하는 것이다.


글쎄, 마르크스 말대로 혁명이 일어나면 누구나 필요에 따라 치킨을 먹을 수 있는 것일까? 마르크스는 치킨이 어떻게 불균등하게 분배되는지 말해 줄 수 있지만 왜 모두가 치킨을 좋아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치킨은 인민의 아편이기 때문일까?


마르크스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한 나는 마르크스의 제자들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치킨은 왜 이렇게 맛있는 거죠?" 마르크스 사회학자들이 대답한다. "치킨에 대한 선호는 사회적ㆍ문화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자들은 미국 흑인들을 예로 든다. 미국 흑인들은 치킨을 소울푸드로 생각하지만, 흑인들의 치킨 사랑은 온전히 자유로운 것이라 볼 수 없다. 미국 흑인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정치적ㆍ사회적으로 소외되었기 때문에 치킨 같은 패스트푸드 말고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는 것뿐이다. 그들도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먹고 싶지만, 치킨을 좋아하도록 사회적으로 '만들어져' 왔다. 사회학자들이 보기에 치킨은 백인과 흑인 간의 불평등과 억압을 은폐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다. 우리도 마찬가지잖아. 야근과 회식이 일상인 한국의 직장인들이 가장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음식은 치킨과 맥주다. 맥주는 상사에게 욕하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을 때 그 갈증을 씻어 넘겨주는 생명수의 역할을 한다. 한국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치킨과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맥주가 공존하는 곳이다. 최소한 맥주만큼은 진지함을 내려놓고 맹숭맹숭하면서 톡 쏘는 맛이 있어야 한다. 축구 평가전이 있는 날 꼭 치킨과 맥주를 같이 준비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걸 아니까. 반면에 독일과 스페인, 브라질 사람들은 축구를 볼 때 치킨을 먹을 이유가 없다. 치킨에 대한 선호마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사회학자들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그럼 과학은 어떨까. 과학자들은 정반대의 대답을 내놓는다. 인간은 치킨을 좋아하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치킨화된 인간'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이기적 유전자가 잠시 옮겨 타기 위한 탈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개체가 아니라 유전자다. 유전자는 자기 유전자를 복제하는 것 말곤 관심이 없다. 생체 로봇인 유기체가 성공적으로 살아남아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경우엔 유전자가 다른 생체기계에게 환승할 때 버스카드 대신 치킨 닭다리를 건네준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우리가 치킨에 환장하는 것은 사실 치킨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치킨을 좋아하도록 유전자가 명령하기 때문이다. 치킨은 단백질이 많고 기름져서 많은 영양분과 칼로리를 얻을 수 있다. 치킨을 많이 먹을수록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을 것이고, 치킨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치킨에 열광하던 조상들만이 살아남았기에, 후손인 우리 역시 치킨을 갈구하는 것이라는 것이 『이기적 유전자』의 요지다.


사바나 초원에서 살던 우리의 선조들이 치킨과 같이 고칼로리 음식을 먹을 기회는 흔하지 않았다. 그들은 매일 치킨을 먹어서 당뇨와 고혈압이 생길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엔 기름지고 고칼로리 음식을 최대한 많이 먹어두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고, 그 상태에서 진화가 멈춰버린 탓에 후손인 우리 역시 치킨에 환장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인간이 치킨을 사랑하는 것은 이기적인 유전자가 프로그래밍해 놓은 결과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 지금까지 나는 치킨이 맛있어서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치킨을 좋아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서였다니. 그럼 지금까지 내가 먹은 치킨은 뭐란 말인가. 닭들의 희생은 또 어떻고. 무엇보다 프로그램이란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뇌에 치킨 프로그램이 심어져 있다니. 인정할 수 없다. 진화론자들 말은 무시하고 이번에는 똑똑한 뇌 과학자들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제 뇌가 치킨을 좋아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뇌 과학자들이 잇몸을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네, 사실입니다." 어라, 이게 아닌데.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번뜩이는 안경 너머로 광기가 스쳐 지나간다. 과학자들은 실험할 때 통계 프로그램을 주구장창 돌리곤 한다던데. 통계 프로그램을 너무 사용한 나머지 미쳐버린 게 아닐까. 어두컴컴한 연구소에 갇혀 하루 종일 쥐를 고문하고 컴퓨터만 쳐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초췌한 인상의 대학원생은 한술 더 떠 우리 뇌가 컴퓨터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뇌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를 컴퓨터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뇌 과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은 컴퓨터처럼 0과 1이 반복되는 이진법으로 작동되고, 뇌는 중앙 연상장치인 CPU와 전문적 기능을 담당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뇌가 수행하는 정보처리 작업은 근본적인 면에서 컴퓨터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치킨을 먹고 있다고 착각하는 매트릭스 속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파란 약을 먹고 매일 치킨을 먹는 즐거움을 택할 것이라는 걸.






keyword
작가의 이전글칸트와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