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과 다르게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라고 한다. 인간만이 본능에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물적인 본능을 참는 것은 도덕적이고, 참지 않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은 것일까? 혹 그러한 의견에 동의한다고 해도, 왜 인간만 스스로 욕구를 억누를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까? 우리가 신의 선택을 받은 고귀한 존재여서일까, 아니면 본능에 맞서도록 진화해서일까?
사자가 갓 태어난 물소새끼를 잡아먹는 것을 보고 비도덕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 사자는 초식동물을 잡아먹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동물들도 도덕을 정의할 수 있다면, 이때 도덕적이란 의미는 나에게 유익하다는 의미다. 사자가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무력한 물소새끼를 잡아먹었다면, 그 사자는 도덕적인 행동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수컷들은 알파 수컷과 정정당당하게 맞붙는 것을 포기하고 암컷인 척 슬그머니 접근해 몰래 도둑교미를 한다. 불쌍한 암컷은 상대가 백마 탄 왕자가 아니라 사기꾼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동물 세계에서는 이렇게 인간 관점에서 비도덕적으로 보이는 도덕적인 행동이 넘쳐난다.
하지만 인간 수컷이 똑같은 짓을 한다면, 그건 명백히 비도덕적인 행동이다. 우리는 비도덕을 응징할 수 있기에 도덕적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굉장히 특별한 동물인 것은 맞다. 이익이 아닌 의무의 관점에서 도덕을 재정의할 수 있는 생명체는 인간이 유일하다. 그것이 신에 의해 선물 받은 것이든, 홉스가 말하듯이 자유를 양보하는 대가로 만들어 낸 것이든, 우리는 매 순간 도덕적인 존재가 되려 애쓰며 살아간다.
물론 선을 넘는 욕망이 존재할 때도 있다. 현실화되지 않은 욕망도 욕망이다. 단지 억압되었을 뿐.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의 추악한 욕망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함부로 내보일 수 없는 것들. 그런 상념들이 잠깐 떠올랐다 사라지는 찰나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자기 안의 동물적이고 야만적인 본성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잠시 후에 내 안의 악마가 남을 해치거나 다른 악마가 나를 해치는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현실에 안도하게 된다. 악마들이 마음껏 날뛰는 곳이 아직도 많긴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21세기에 대한민국이라는 문명국에서 태어났다. 이제 우리는 원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거나 당할 걱정을 하지 않으며 살아도 된다. 필요하다면 더 세련된 방식으로 폭력을 대리해 줄 수 있는 정부 조직이 있다. 우리의 도덕성이 어떠한 형태를 띠고 있는지 깨달을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그림자에 숨어 있는 야만적인 본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는 다른 동물들처럼 유용성의 관점에서 도덕을 바라보지 않는다. 실제로는 동물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아가면서도 말이다. 민주주의, 삼권 분립, 인권이라는 아이디어를 발명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나에게 도움이 되고 쾌락을 주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육식을 예로 들어보자.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고기를 먹기 위해 달리고, 창을 만들고, 팀을 이뤄 협력해 왔다. 고기가 맛있어서 사냥을 한 건지, 고기를 먹다 보니 고기를 좋아하도록 진화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닭고기건 소고기건 고기는 다 맛있다는 점이다. 끔찍하게 못 구웠거나 태우지 않았다면, 고기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가축을 기르고 죽여 그 고기를 먹는다. 이때 우리는 동물의 도덕에 따라 행동한다. 사자처럼 생존에 도움이 되는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즐거움을 위해 무기력한 생명을 해치거나 해치도록 방관하는 것은 비도덕적이지 않을까? 물론 나는 삼겹살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육식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고기를 먹는 기쁨을 위해 다른 생명을 해치는 것은 종을 막론하고 비도덕적이라 믿는다. 후라이드 치킨과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를 기꺼이 포기할 준비가 된 사람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