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도덕성
발리의 원숭이 사원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다.
“소지품 도난에 주의하시오.(특히 선글라스를 잘 훔쳐갑니다)"
사원 관리인들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절도범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몽키 포레스트에 사는 필리핀원숭이는 관광객의 핸드폰이나 선글라스 같은 귀중품을 훔치는 걸 부수입으로 삼아 살아간다. 방문객들은 경고문을 보고도 원숭이의 손이 얼마나 빠른지 무시하다가 매번 당한다. 수입이 꽤나 쏠쏠하다. 그들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 협상을 제안하는데, 최소한 크래커 한 봉지는 되어야 한다. 그 이하의 가치를 지닌 물건을 협상 테이블에 올리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에 버리거나 부러뜨린다. 몽키 포레스트는 말 그대로 갱스터 몽키들이 지배하는 곳이다.
원숭이 노동자도 있다. 인도에서는 붉은털원숭이의 침입을 막기 위해 회색랑구르라는 원숭이를 경찰로 고용한다. 강력한 이빨로 무장한 랑구르 경찰 팀은 사무실이나 정원, 국회 의사당에서 털 없는 원숭이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월급은 바나나로 받는다. 신기한 일이다. 원숭이는 어떻게 물물교환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 걸까? 사과와 바나나를 바꿔 먹도록 자연선택 된 걸까?
흰목꼬리감기원숭이에게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연구자들이 팔을 뻗어 먹도록 무거운 접시에 먹이를 올려놓으면, 친구인 바이어스와 새미가 힙을 합쳐 접시를 당긴다. 하지만 새미가 재빠르게 먹이만 집고 접시를 놓는 바람에 바이어스는 먹이를 먹지 못했다. 혼자만 얄밉게 먹는 새미를 보고, 바이어스는 죽을 듯이 소리를 지른다. 결국 새미는 먹던 걸 내려놓고 함께 접시를 당겨 바이어스를 도와준다. 동료의 배신에 대해 분노를 표현하자, 새미가 미안함을 느끼고 자기 행동을 교정한 것이다.
우리는 공정성이 자기 이익을 넘어서는 고귀한 무엇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인간의 평등과 공정에 대한 느낌은 바이어스와 새미의 협력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팀워크를 배신한 동료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 이에 죄책감을 느낀 배신자의 반성, 덕분에 다시 회복된 관계까지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도덕적 판단에는 개인의 이익 추구가 숨어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아이들 역시 자기 피자 조각만 작으면 불같이 화를 내거나, 울면서 본인만 차별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 가장 눈에 띄는 감정은 억울함이다. 차별, 평등, 공정, 정의. 표현은 다를지라도 다 비슷한 정서를 교집합으로 두고 있는 것이다. 공정성은 영장류 때부터 이어져왔던, 진화의 소중한 유산이기에 정치적 마음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평등을 추구하려면 비교는 필수적이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상대적 박탈감이 일어난다. 마카크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고 오이를 보여 주면 어떻게 될까. 곧 실험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조약돌과 오이를 물물교환한다. 카지노 칩처럼 이용하는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마카크는 오이를 맛있게 먹는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친구가 포도를 받으면, 그 순간 폭발해 사육사에게 오이를 집어던지고 철창을 마구 뒤흔든다. 자신만 불공정한 대우를 받은 것에 항의하는 것이다.
우리도 다를 바 없다. 미국에서 일어난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는 '왜 누구만 포도를 먹느냐'에 대한 울분의 표현이었다. 문화와 국가를 막론하고 시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는 평등, 공정, 정의, 차별 같은 말들이다. 시위 현장에는 폭력과 고성, 분노가 넘실거린다. 협동하는 사냥꾼들에게 분배 문제는 특히 중요했다. 10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부의 분배는 여전히 정치의 핵심 주제다. 평등ㆍ공정 같은 거대 담론을 어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지만, 동시에 동물적인 본능에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주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도의 차이가 있어도 보수와 진보 모두 평등을 좋아하지 않을까? 진보주의자는 보수가 평등에 반대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보수 역시 평등을 좋아한다. 관점이 다를 뿐이다. 보수주의자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한다. 적절한 기준, 그리고 그 기준을 충족시킨 이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평등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보수가 생각하기에 경쟁은 평등과 공존할 수 있으며, 누구나 동의할 기준만 있다면 그 속에서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노력과 능력에 따라 차이가 갈리는 것도 당연하게 여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룰이다. 진보주의자는 룰보다는 결과적 평등에 무게를 두지만, 보수주의자는 절대적 기준에 따른 보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복지에 대한 관점 차이가 여기서 나타난다. 세금을 인상해 복지를 확대하는 것에 반대하는 게 대표적인 예다. 보수주의자는 세금 문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국가라는 공동체 속에서 정부(지도자)가 합당한 노력으로 번 소득을 빼앗아 무임승차자에게 돌려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력 없이 과실만 뺏어가는 이기적 존재가 있다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에 대한 합의가 송두리째 무너져버릴 것이다. 그럼 협력은 무너지고 혼돈이 생긴다. 이런 생각은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인 정치적 세계관 속에서 작동하기에 인식하기 힘들다. 영장류의 공정성 감각은 오래된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통계나 논리로 보수를 설득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전제부터가 다르니, 보수와 진보는 사실상 다른 이야기를 하는 셈인 것이다. 결국 보수주의자를 냉혈한으로 오해하는 계기가 된다.
보수의 도덕성에는 분노와 응징 같은 보복적인 심리가 숨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중립적인 의미인데, 적절한 기여를 한 사람에겐 오히려 보상이 충분히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 같이 노력하고 기여했는데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 화를 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이러한 울분의 감정이 평등을 촉진시킨다. “죽도록 노력했는데 겨우 토끼 뒷다리뿐이라고, 다음에 잘 주겠지 뭐”하고 쿨하게 넘어가는 사냥꾼은 아내와 자식에게 충분한 고기를 공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반나절 내내 나무 위에서 졸던 얄미운 동료가 자기와 똑같은 대우를 받았는데 관대하게 넘어가는 조상들은 결코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불공정은 집단에 대한 충성심과 노력하려는 동기 부여를 약화시키기 마련이다. 무임승차자를 제대로 억제하지 못한 구성원들은 라이벌 부족과의 경쟁에서 패배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다. 이를 동양에서는 '역지사지', 서구에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하며, 경제학에서는 '팃포탯(Tit For Tat)'이라고 한다. 협력에는 협력으로, 배신에는 배신으로 갚아주는 것이다. 복수는 예나 지금이나 달콤하다.
실험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공정성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실험은 '최후통첩 게임'이다. 실험 참가자를 임의로 두 명씩 짝짓고, 한 명에게만 돈을 주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나누라고 한다. 다른 한 명이 부당한 제안을 거부하면 둘 다 못 받는다. 이때 결정권자에게 가장 합리적인 전략은 자기가 전부 가지거나 조금만 주는 것이고, 다른 한 명은 억울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챙기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분배 형태는 5:5 전략이다. 사람들은 불공정하다고 느껴지면 아예 안 받고 만다. 자신이 손실을 입더라도 불공정한 제안을 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다. 이를 ‘이타적 처벌’이라 한다. 자신이 손해를 입더라도 이기주의자에게 응징을 해 협동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보복과 응징으로 사회 안정과 질서를 유지해 왔다. 경제적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틀렸다. 우리 모두 정치적 인간인 호모 폴리티쿠스다.
또 다른 실험도 있다. 공정한 파트너와 불공평한 파트너가 전기충격을 받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뇌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공평한 거래를 제안한 파트너가 전기 쇼크를 받는 걸 지켜볼 때, 참가자의 뇌에선 통증에 반응하는 부위의 활동이 증가했다. 공감 반응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불공평한 거래를 제안한 파트너가 고통을 받는 걸 보자, 쾌감 중추인 측핵의 반응이 증가했다. 그리고 보수주의자가 더 기뻐했다.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는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며 느끼는 즐거움을 의미하는데, 샤덴프로이데는 조금 묘하고 정치적인 방식으로 실재했던 것이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어떤 사회가 불평등이 극심하고 공정하지 않다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타인의 고통을 즐거워하는 성향도 늘어나지 않을까?
실제로 그런 것 같다. 2017년 실시한 한 설문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계층 상승 기회가 열려 있다"는 주장에 한국인의 73%가 동의하지 않았다. 법 집행이 불공정하다는 인식은 74%, 부의 분배 및 취업 기회에서는 71%가 불공정하다고 대답했다.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 요인으로는 부모의 배경과 연줄이라고 대답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정당한 경쟁과 노력을 한 사람에게 과실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현재의 한국 사회는 기회의 균등과 룰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보수와 진보 모두 공정하지 않은 한국 사회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 냉소주의, 비관주의, 가학성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한국의 악플 비율은 4:1로, 1:4인 일본, 1:9인 네덜란드 등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또한 갑질, 진상, 학교폭력 같은 괴롭힘이 동시에 사회적 문제가 되는 곳도 한국이 유일하다. 모두 불공정한 사회가 만드는 부작용이며,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이제 한 가지는 확실하다. 침팬지와 보노보 둘 다 오이를 싫어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