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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의 어깨동무

보수의 뇌

by 교양이



1940년 8월 24일, 독일군 폭격기 두 대가 야간비행을 하다 길을 잃었다. 조종사들은 대공포화를 받자마자 서둘러 폭탄을 떨구고 도망쳤다. 운이 나쁘게도 폭탄이 떨어진 곳은 런던 시내 한복판이었다. 피해가 막심했다. 분노한 윈스턴 처칠은 베를린에 공습을 명령했다. 독일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히틀러의 오른팔 헤르만 괴링은 3주 안에 폭격으로 영국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한 달 후인 9월 7일, '루프트바페'라 부르는 독일 공군 348대가 영국 해협을 횡단한다. 이후 9개월에 걸쳐, 8만 개의 폭탄이 런던에 투하되었다. 영국 행정부는 포격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와 공황에 빠질 민간인들을 위해 정신병동을 건설했다. 정치인들은 곧 다가올 혼돈과 야만에 몸을 떨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정신병동이 텅 비었다. 처칠이 걱정했던, 경찰력이 부재한 혼란 속에서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던 약탈과 방화, 살인과 강간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짐승이 되지 않았다. 알코올 중독과 자살률이 줄어들었다. 정신 건강이 오히려 향상되었다. 잿더미가 돼버린 런던에서는 희망이 넘쳐났다.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갈등은 잊혔다.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서로를 도왔다. 파괴된 도시의 무기 생산량은 포격을 받지 않은 도시의 생산량보다 최대 14배까지 높았다. 런던 시민 4만 8천 명이 사망했지만, 홉스가 말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베를린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대공습. 얼굴에서 절망과 공포를 찾아볼 수 없다.


오직 권력을 가진 이들, 처칠과 히틀러만이 서로의 수도에 폭탄을 쏟아부으면 적대국에 진정한 야만이 찾아오기를 기대하고 무의미한 포탄을 쏟아부었다. 우연하게도 두 지도자의 서재에는 귀스타보 르봉의 <군중 심리학>이라는 책이 꽂혀있었는데,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있다.


인간의 문명은 한순간에 여러 단계로 퇴화한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같은 독재자들만이 모두 이 책을 소장하고 책 귀퉁이가 해질 때까지 여러 번 돌려 읽었다. 그들은 르봉이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문명의 껍데기가 벗겨지면 숨겨왔던 폭력성을 분출하는, 문명 이전 침팬지와 같은 수준으로 돌아갈 것이라 믿었다. 그러고는 오직 본인만이 그 혼란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독재자들은 인간 본성이 자기와 같다고 생각한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가 악에 가득 차 있다고 믿는다. 2005년 8월 29일, 거대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상륙해 주택의 80%가 물에 잠기고 1,836명이 죽었던 그날도 그랬다. 언론은 어림짐작과 뜬소문, 망상을 마음껏 부풀렸고, 판뚜껑 이론을 재등장시켰다. 뉴올리언스 주에 성폭행과 총격, 폭력배와 약탈이 만연하다고 보도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피소인 슈퍼돔에는 2만 5,000명이 전기도, 물도 없이 함께 모여 있었다. 경찰서장과 주지사는 도시가 무정부 사태로 빠져들었다고 생각해 진입을 꺼려했다. 역사학자 티머시 같은 애시는 음식과 물과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몇 시간 안에 홉스가 말하는 자연 상태가 일어나고, 대부분 유인원으로 되돌아갈 것이라 확신에 차 말했다.


이번에도 우려했던 아비규환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식수와 식량이 떨어졌는데도 서로를 더 돕고 배려했으며, 모두가 하나 되어 역경을 헤쳐나갔다. 하지만 경찰과 군대는 현장을 어떻게 제압할지 걱정하느라 대응이 늦었고, 오히려 고통만 가중시켰다. 그럼에도 살인이나 강간 같은 폭력 범죄는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사학자는 최소한 두 가지는 몰랐던 게 확실하다. 일단 우리 모두는 유인원이다. 그리고 유인원은 바나나가 부족하고 표범이 어슬렁거리는 야생에서도 인간보다 훨씬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아간다. 침팬지와 보노보, 고릴라와 오랑우탄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다.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목숨이 위태로울 때 가장 좋은 대처법은, 가진 것을 빼앗거나 죽이는 것이 아니다. 서로 뭉치는 것이다. 한 침팬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졌을 때, 다른 침팬지들은 한참 동안 서로를 부둥켜안고 위로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공포와 불안에 온몸을 떨 때, 고난과 역경에 처할 때, 더 강한 협력의 물결이 일어난다. 두려움은 전염되지만,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희망과 용기, 희생정신과 이타심도 전염된다.






물론 협동이 전부는 아니다. 실제로 공포를 느끼면 공격성이 쉽게 촉발된다. 겁이 많은 개가 낯선 사람을 보고 더 맹렬하게 짖고 입질을 한다. 겁을 먹은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며 냥냥펀치를 날린다. 두려움과 공격성은 하나의 짝을 이룬다.


그 역할을 하는 게 바로 편도체다. 편도체는 아몬드처럼 생긴 아주 작은 부위지만, 생명체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편도체는 공포 기억을 형성해 위험한 대상으로부터 도망치게 하고, 불안이나 혐오라는 감정을 만들어 잠재적인 위험 대상에 접근하지 않게 한다.


편도체는 공격성에도 관여한다. 사람들은 공격성을 사라져야 할 것으로 보지만, 공격성이 없으면 동물은 살아갈 수 없다. 행동할 동력을 제공받지 못하는 것이다. 폭력은 공격성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다. 자기 방어, 짝짓기, 종족 보호, 사냥을 하기 위해서도 공격성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편도체 안에 두려움과 그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메커니즘이 내장되어 있는 게 된다.


날때부터 편도가 큰 사람은 어떨까. 죽음이나 사고, 불확실한 미래, 새로운 변화, 경쟁 집단에 대한 불안을 많이 느끼는 동시에 공격적인 태도도 강할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협력과 유대도 강화될 것이다. 그게 바로 보수주의의 심리적 뿌리이자, 본질이다. 정치학자 존 히빙은 보수주의자가 공격으로부터 생명과 신체를 방어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또한 범죄자를 강경하게 처벌하고 군사적 대응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더 뚜렷한 놀람 반사를 보이는 것도 관찰되었다. 미국의 보수적인 주에서는 범죄율이 높은 시절에 사형 선고와 집행이 증가했다. 진보적인 주에서는 오히려 감소했다.


공포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증오와 충성심은 자기 꼬리를 무는 뱀처럼 맞물린다. 보수적인 학생들에게 죽음에 관한 글을 쓰고, 타인의 정치성향에 따라 컵에 핫소스를 따르게 하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학생들은 자신과 같은 신념을 가진 학생들에겐 조금 따랐지만, 다른 신념을 가진 학생들에겐 두 배가 넘는 핫소스를 부었다. 시험에 관해 생각해 보라고 했을 때는 둘 다 별 차이가 없었다. 불안이 내집단의 신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을 해치려는 욕구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다른 실험도 마찬가지 결과를 낳았다. 죽음과 9.11 테러를 떠올린 보수주의자들은 미국에 위협을 가하지 않은 국가들에게도 선제적인 핵이나 화학 공격에 찬성했다. 다른 연구에서는 외국인 용의자에게 고문을 허용하는 데 찬성했다. 보수적인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과 이란에 대한 핵 공격을 지지했다. 이란 대학생들은 미국에 대한 순교와 자살 폭탄 테러범에 더 큰 관심을 드러냈다.


편견과 차별로도 이어질 수 있다. 죽음을 떠올리면 특정 집단을 선입견으로 바라보게 된다. 죽음을 떠올린 의대생은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이슬람교도를 진찰한 후 별로 심각하지 않다고 추정하지만, 기독교인을 진찰하면 심장병 위험이 심각하다고 진단을 내린다. 또한 죽음을 상기한 미국인들은 단정하고 체계적인 독일인, 여자 같은 남성 동성애자, 저녁식사 비용을 내는 남성, 아이들을 돌보는 여성을 선호한다. 고정관념과 편견이 개인의 무지나 혐오이기 이전에,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는 증거다. 모두 자신이 속한 집단을 도덕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심리적 체계인 것이다. 그렇게 인류는 선과 악을 구별하고, 우리와 그들을 구별하고, 죽음과 불안에 맞서 왔다. 전쟁과 테러는 타고난 폭력성의 발현이라기보다는, 군집성의 끔찍한 부산물인 셈이다.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공격성은 그것의 짝인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공격성 없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격성과 사랑은 뒤섞인다. 새끼를 엄하게 대하는 붉은털원숭이 어미는 딸과 평생 유지되는 가까운 관계를 맺는다. 침팬지는 딸을 거의 혼내지 않지만, 그만큼 자식과의 관계가 빈약하다. 단순히 공격성을 기준으로 보면 붉은털원숭이는 나쁜 어미, 침팬지는 좋은 어미지만, 유대를 기준으로 하면 결과는 정반대가 된다. 우리도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에게 상처를 되는 말을 쉽게 하지 않던가. 혼나는 아이는 울면서 어머니의 품에 매달리고, 애정과 용서를 갈구하며 부모를 더 사랑하게 된다. 애착은 그런 식으로 강화된다. 사랑 호르몬이라 부르는 옥시토신을 코로 흡입하면 자국민에 대한 애정이 증가하지만, 동시에 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증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크기변환]KakaoTalk_20231017_091522439.jpg 어미에게 혼나는 붉은털원숭이 새끼


모순되는 듯 보이는가? 한때는 공격성을 반사회적으로 규정하며 사라져야 할 것으로 보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낡은 이론이 되었다. 공격성의 목적 중 하나는 관계의 우위를 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사회적이다. 더욱이 공격성 안에는 그것이 초래할 결과를 완화하고 승화시킬 수 있는 완충 장치가 숨어있다.


보수는 태생적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많이 느끼는 존재이기에, 강한 공격성과 지배욕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치열하게 다투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협력과 우정이 싹튼다. 비가 온 뒤 땅이 굳는 것처럼, 싸우고 난 뒤에 관계는 더 단단해진다. 호감과 혐오감, 협력과 경쟁, 통합과 차별 모두 보수주의자를 설명하는 단어가 될 수 있다.


진실은 언제나 안개처럼 희미하고 축축하게 떠다닌다. 진보주의자는 보수주의자들이 폐쇄적이고 자기 사람만 챙긴다고 불평하지만, 그 역시 질서와 안정이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보수주의자는 더 겁이 많기 때문에 더 협력하고 결집할 수 있었고,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국가나 문명이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만들어 냈고, 호모 사피엔스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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