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인간
짧은꼬리원숭이 새끼의 팔이 덜렁거린다. 회전바퀴에서 묘기를 부리다 부러진 탓이다. 하지만 어미 원숭이는 자기 딸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사육사들이 사과와 바나나, 파인애플을 흩뿌리자, 엄마의 마음이 급해진다. 딸의 손을 거칠게 잡아채 나무에서 펄쩍 뛰어내린다. 딸이 고통의 비명을 지른다.
엄마 침팬지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어린 아들의 손목이 부러졌기 때문이다. 혼자서 먹이를 먹지 못하다 보니 한참 전에 뗀 젖을 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떼를 쓴다. 투정이 갈수록 심해진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결국 어미의 품은 징그럽게 다 큰 첫째가 차지했다. 졸지에 찬밥신세가 된 막내는 서러워 귀가 째지도록 울어젖힌다. 엄마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래도 아들의 팔이 다 나을 때까지는 참기로 한다.
엄마 짧은꼬리원숭이는 자식을 학대하는 것일까? 하지만 어미 원숭이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며, 어미 침팬지 역시 평범한 침팬지다. 둘의 차이는 공감의 방식에 있다. 짧은꼬리원숭이에게 부족한 건 공감이 아니라 자식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다. 그녀 역시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성공한 짧은꼬리원숭이가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팔이 부러진 자식을 돌볼 때는 자식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원숭이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비눗방울에 갇혀 지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몇 가지 사례가 더 있다. 교토에 있는 일본원숭이 공원 관리인은 처음 엄마가 된 원숭이들이 온천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감히 원숭이 따위가 온천을 즐기는 걸 용납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아기가 배에 매달려 있는데도 목까지 푹 담근 채 뜨끈한 온천을 즐기기 때문이다. 초보 어미는 아기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기에, 자기 머리가 수면 위에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한다. 개코원숭이도 그렇다. 섬에 홍수가 나서 야생 개코원숭이들은 헤엄쳐 다른 섬으로 가야 헀는데, 어른들은 어린 원숭이들을 남겨두고 먼저 떠났다. 새끼가 헤엄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공감은 만능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공감은 타자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공감은 곤경에 처한 이를 돕는 출발선이 되기는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누군가를 도우려면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공자가 역지사지(易地思之)라 불렀던 것을 심리학에서는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이라 부른다. 관점을 이동하는 능력은 사회적인 동물에게서도 소수에게만 허용된 능력이며, 마음 이론은 원래 영장류 연구에서 나온 개념이다. 질투에 찬 인간이 정의를 바꿔 자신만 가능하다고 못 박기는 했지만.
공감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동정심이라기보다는, 자동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에 가깝다. 거울신경세포 덕분에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고 돕고 싶어 한다. 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조금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타인과 나를 분리한 채, 조금 멀찍이 떨어져 머리를 식히고 냉정하게 바라봐야만 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는 다른 능력이 필요하다.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능력, 냉정한 상황 판단, 구체적인 행동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가끔씩 유인원이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하려다 함께 빠져 죽는 경우가 있는데, 순간적인 감정에만 충실했기 때문이다. 동정심이 유인원의 물 공포증을 이겨내도록 했지만, 문제 해결에는 실패한 셈이다. 유인원 중 상황 판단이 가장 뛰어난 인간은 물에 뛰어들어 같이 허우적대기보다는 튜브를 건네주는 게 낫다는 걸 안다.
물론 훌륭한 구조 사례도 있다. 스웨덴의 한 동물원에서, 알파 침팬지가 밧줄에 뒤엉킨 어린 침팬지를 훌륭하게 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 어린 녀석은 밧줄에 매달리는 장난을 치다 뒤엉켜 숨이 막혀 죽어가고 있었다. 어른 침팬지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일단 새끼를 들어 올려 압력을 줄이고 나서, 조심스럽게 목에서 밧줄을 푼 것이다. 이때 도와주고 싶은 마음만 앞서 밧줄을 잡아당기기만 했다면 오히려 더 위험했을 것이다. 동정심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일차원적인 공감에서 벗어나 상황과 목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걸 암시하는 일화다.
공감이 높은 수준에서 작동하려면 자신과 타인을 일치시키는 동시에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의 입장과 내 입장 모두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과 남을 구분하지 못하면 도움을 줄 수 없다. 관점 이동 능력은 공감과는 다른 종류의 타인 이해 능력으로, 타인의 선호, 의도, 신념 등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공감 능력은 정서적이고 직관적이고, 관점 이동 능력은 인지적이고 분석적이다.
공감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공감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이다. 심리학자들이 참가자들에게 산속에서 길을 잃은 등산객의 감정을 표현해 보라고 했다. 운동을 한 참가자들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등산객들이 갈증을 더 심하게 느끼고 물을 챙기지 않은 걸 후회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공감 편향을 입증하는 실험이다. 공감은 신체의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이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있는 것에 한해서만 공감할 수 있다.
우리의 정치가 무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렵채집을 하던 시절에는 서로가 서로를 아는 좁은 사회에서 정치가 이루어졌다. 나의 감정과 입장은 상대의 그것과 무관하지 않았으며, 이해관계는 밀접하고 뒤섞여 있었다. 지배와 복종 관계는 얼굴이 마주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관계에서만 이루어졌다. 덕분에 높은 지위를 가진 이들도 함부로 약자를 대우하지 못했다. 공정과 불평등 문제 역시 일상에서 매우 중요했다. 동료의식과 연민, 질투심과 분노, 사랑과 증오 같은 감정은 정치와 떼어놓을 수 없었다. 우리의 일상은 침팬지처럼 매 순간이 정치적이었다.
반면 현대 정치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추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복지나 평등 같은 거대 담론은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시간은 투표장에서의 5분이 전부다. 그것마저도 정치인들의 선전과 왜곡에 의해 우리의 판단이 놀아난다. 정책과 담론은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하고 무의미한 언어적 수사로 구름처럼 떠다닌다. 대신 지루하고 편향적인 뉴스, 국회의원들의 막말과 멱살잡이, 온갖 정치적 음모나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그 자리를 채운다. 지금 우리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강력하고 유용한 정치적 감정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무의미한 고성이 오갈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부모님을 여의고 쪽방촌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7살 아이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실제로도 충분히 있을만한 사례다. 할머니의 건강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고, 아이는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가정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고, 행정 문제까지 겹쳐 지자체가 당장 도움을 줄 법적인 근거가 희박하다. 겨울은 다가오는데, 수도와 전기도 끊길 예정이다. 정부가 도움을 주어야 할까?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자는 복지에 반대하고 진보주의자는 복지에 찬성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보수주의자는 과연 힘들게 살아가는 아이를 외면할까? 늘 그랬듯이 개인의 책임과 노력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고개를 돌릴 뿐일까?
나는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한다. 인간의 공감능력은 명확한 한계가 있다. 보수주의자의 공감 범위는 좁다. 하지만 그만큼 강력하다. 가족, 친척, 학교 선후배, 친구, 직장 동료, 당장 눈에 보이는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까지,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거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보수의 공감은 강한 힘을 발휘한다. 불가피하게 고난에 처했거나 노력하는데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아이와 할머니를 보면 보수주의자는 눈물을 흘릴 것이다.
진보가 생각하는 보수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지 않은가? 진보는 보수주의자가 냉담하고 이기적이며,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실상은 정반대다. 보수주의자의 공감이 더 높게 나온 연구결과도 있다. 눈에 보이거나 구체적인 대상에 한해서라면, 보수는 진보주의자보다 더 강한 연민과 슬픔을 느낀다. 실제로 미국의 보수적인 주는 진보적인 주보다 기부금이 더 높다. 허리케인으로 모든 걸 잃어버린 피난민들을 돕기 위해 며칠을 차로 달려가는 사람들도 대부분 보수주의자다.
진보주의자가 보기엔 모순된 듯 보인다. 복지에 반대하고, 불평등을 용인하고, 소득 재분배 정책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해고를 주장하는 이들이 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우려 하는가?
보수 입장에서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진보는 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우려 직접 나서지 않으면서 말로만 평등과 복지를 이야기하는가? 왜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론을 늘어놓으며 세상이 쉽게 좋아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가? 급격한 변화는 더 큰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는 대신에 라면으로 끼우를 때우는 아이에게 쌀이나 반찬이라도 갖다 주는 게 낫지 않을까?
공감은 자동적으로 일어나고, 구체적인 대상에 한정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공감의 범위가 넓어지면, 각각의 대상에 대한 공감은 약해진다. 대신 자신과 타인의 분리가 일어난다. 그럼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볼 수 있지만, 감정의 강도는 약해지는 대신 문제 해결 측면에서 바라보게 된다. 공감 범위가 넓은 진보주의자라면, 기부를 하는 대신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바꾸자고 이야기할 것이다. 냉정하게 보일 수 있지만, 구조적인 문제에 집중해서 현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들은 팩트에 기반한 주장이나 이성적인 논증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한다. 도덕적 감정보다는 논리나 증거에 집착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론적인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그런 설득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말보다는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더 힘이 센 법이다. 진보주의자는 관점 이동 능력이 뛰어나지만, 보수주의자는 직관적인 감정 이입에 뛰어나다. 그래서 비록 자기중심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일단 판단과 고려의 대상이 되면 그들과 하나가 된다. 일단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면, 무조건적인 도움을 주고 하나가 되어 뭉친다. 애국심, 지역주의, 전통과 사회 질서에 대한 애착이 그 결과다.
보수는 좁지만 확실한 공감 범위에 기반한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안정과 질서를 좋아한다. 그들은 사회의 규범과 제도에 순응하고 살아가며, 그것이 옳다고 느낀다.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확실하며, 사회가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선 위계질서와 불평등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아이들에게는 책임과 노력, 권위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고 예절을 중시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성실하고 신중하다. 사회 자체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주어진 환경 내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자기 통제력이나 책임감, 삶에 대한 만족도 역시 보수주의자에게서 더 높이 나타난다.
반면 진보주의자는 공감 범위가 넓고 모호하기에 불확실성을 더 잘 견디며, 변화와 새로운 경험을 좋아한다. 삶은 불안정하지만 그만큼 변화무쌍하다. 그들은 전통과 권위에 저항한다. 공감의 범위가 인류라는 추상적 형태로까지 확대되기에, 모두가 평등하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인권이라는 말이 진보주의자의 입에서만 나오는 이유다. 진보 인권 변호사는 많지만 보수 인권 변호사는 없다. 아이들에게는 다양한 경험과 약자에 대한 배려, 삶을 즐기는 태도를 강조하며,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만 않으면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도덕성의 적용 범위를 넓힐수록 지성에 더 의존하게 하기 때문에, 진보주의자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려 노력한다. 진보주의자는 모든 게 잘 될 것이라고 믿는, 새로운 걸 찾아다니고 정신없는 보노보다.
무엇이 침팬지와 보노보를 만드는 걸까. 보수와 진보의 선천적인 차이에 관한 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다. 하지만 오래된 책에 가려진 먼지가 조금씩 풀풀 날리며 숨겨진 글귀가 드러나고 있다. 덕분에 어느 정도의 일반화를 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다. 심리학자들은 가치관을 구분하는 광범위한 요인 두 개를 발견했는데, 그중 하나가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지, 아니면 사회적 전통과 동조성을 추구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와 신기할 정도로 대응되는 연구 결과다.
사람들의 방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 연구팀은 학생들의 기숙사에 있는 물건만 봐도 정치 성향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진보적인 학생들의 방에서는 유독 책이 많았고, 영화나 여행 티켓 등 새로운 경험과 관련된 물건이 많았다. 그들은 재즈, 레게, 클래식 등의 잔잔한 음악 취향을 가지고 있었고, 지적이고 예술적인 문화생활과 관련 물품이 주를 이루었다. 반면 보수적인 학생들의 방 안에는 성조기나 스포츠 등 공동체와 관련된 물품이 많았다. 또한 행사 계획표나 수선용품, 다리미 등 정리정돈이나 계획과 관련된 물건이 많았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바로 프레임 차이 때문이다. 프레임은 곧 세계관을 의미한다. 프레임은 무의식 속 깊은 영역에서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지 결정하는 근본적인 사고의 틀이다. 프레임 때문에 침팬지와 보노보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정치적 프레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침팬지와 보노보가 화해하는 일도 없지 않을까.
이제 화성에서 온 침팬지와 금성에서 온 보노보를 만나러 가보자.